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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7.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3)

삼국지 속 전쟁들 06

  우금은 조조의 부하들 가운데서도 손꼽을 만한 명장이었습니다. 과도할 정도로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서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성격이 엄중하고 강직해 위엄이 있었지요. 그런데 근 20년 가까이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훈을 세우다가 갑작스레 기록에 공백이 생깁니다. 구체적으로는 조조가 적벽에서 패한 후 여강의 반란을 토벌할 때 파견되었던 시점부터(209년) 형주 공방전(219년) 이전까지 근 10년 동안이나 말이죠.  


  짐작이지만 승진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위가 좌장군이면 이미 일반적인 장군들보다 급이 높았죠. 장료, 서황, 장합 같은 뛰어난 장수들은 물론이거니와 하후돈이나 조인 같은 친족들도 죄다 벼슬로는 우금보다 아래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좌우후 사방장군(四方將軍)이 실권과 함께 명예직의 느낌도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금은 반쯤은 은퇴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참고자료 : 삼국시대의 장군 칭호)


  사실 조조가 처음부터 우금을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오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넷째 아들 조창을 북중랑장으로 삼아 북쪽으로 파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다섯째 아들 조식을 남중랑장으로 임명해 군사를 통솔하게 하려 했죠. 하지만 조식은 ‘술에 떡이 되어 있어서’ 그 명령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어이가 증발해버린 조조는 탄식하며 다시 우금에게 병력을 맡겼지요. (참고자료 : 조조의 세 아들 (4))


  이때 우금의 7군은 조조가 끝까지 아껴둔 예비병력이었습니다. 인원도 엄청났어요. 1군의 편제는 대략 1만 명에서 12,500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7군은 7만 명에서 87,500명 사이로 볼 수 있습니다. 설령 편제상 인원을 다 맞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금의 병력은 최소한 5만 명 이상은 되었던 걸로 보입니다. 반면 관우가 동원한 병력은 알 수 없지만 우금의 7군보다 적은 건 확실합니다. 저는 최대한으로 잡아 봤자 3만 명 가량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조조의 광활한 영토를 생각하면 7개나 되는 군을 동원한 이후로도 추가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무슨 게임처럼 돈이랑 식량 쓰면 군사가 뿅 하고 생겨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훈련을 시키고 무기와 갑주도 만들어서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어요. 조조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습니다. 우금의 7군이 관우를 격파한다면 그보다 좋을 수야 없겠지만, 하다못해 시간만 끌어 주더라도 조조에게는 충분히 이득이었습니다. 평생 군사를 한 번도 지휘해보지 못한 아들에게 병력을 맡기려 했던 것도 그런 의도가 있었던 까닭이었습니다. 물론 훌륭한 장수를 딸려 보냈을 게 틀림없겠습니다만.

 

  관우의 입장은 당연히 정반대였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 세력이 작은 쪽인 관우가 불리해질 것은 자명한 이치였습니다. 관우는 조조가 힘을 회복하기 전에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7군이 도달하기 전에 양번을 점령해야 했지요. 그게 안 되면 병력이 우월한 7군을 상대로 자웅을 겨루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양번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공격을 퍼붓습니다. 




  조인도 성에 틀어박힌 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관우와 끊임없이 전투를 벌입니다. 여기서 방덕이 활약하죠. 삼국지연의에는 우금의 부하였던 걸로 나오지만 사실은 조인의 부장(副將)이었습니다. 본디 마초의 부하였기에 번성의 여러 장수들은 그를 의심합니다. “옛 주인 마초도 저쪽에 있고 사촌형 방유도 저쪽에 있다던데 이 녀석 배신하는 거 아냐?”라고요. 방덕은 어찌나 억울했던지 “내가 올해 관우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가 죽든지 결판을 내겠다!”라고 말하고는 용맹하게 싸웁니다. 얼마나 잘 싸웠던지 관우의 군사들이 흰 말을 타고 다니는 방덕을 백마장군(白馬將軍)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고 하지요. 심지어 야전(野戰)에서 직접 화살을 쏴 관우의 이마를 맞히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방덕으로서는 안타깝게도 그의 상대는 관우였습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라고 시킨, 이미 인간이기를 초월한 존재가 아닌가 싶은 그 사람요. 관우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맹공을 가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으로 등극하고 관우를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한 후 절월을 내립니다(가절월假節鉞). 가절월이 뭔지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지니까 황제의 특권 일부분을 내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황충과 동격으로 취급받았다고 불쾌해하다가 비시에게 지적받고 깨달았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도 등장하죠. 


  그러나 결국 관우는 조인을 꺾지 못했습니다. 조인은 만총과 함께 번성을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그리고 8월이 되자, 전황을 단숨에 바꿔버릴 우금의 7군이 마침내 형주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우금은 일단 신중을 기해 병력을 번성 북쪽에 머무르게 합니다. 조인은 방덕을 번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킵니다. 아마도 우금과의 연계를 위함이었겠지요. 그리고 방덕이 그곳까지 진출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번성의 포위도 잠시나마 풀린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관우에게는 위기였지요. 우금이 전 병력을 들어 공격해 오면, 설령 한수의 수군을 버팀목으로 삼아 막아내더라도 북쪽의 번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금은 공격해 오지 못합니다. 비 때문이었습니다.


  이 장마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거의 열흘이나 이어지며 한수를 범람시켰고, 저지대에 위치한 번성 주변은 완전히 물바다가 됩니다. 번성의 성벽이 5~6장(丈)이나 잠겼다고 하는데 적게 잡아도 족히 칠팔 미터나 차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물에 잠기지 않고 남은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죠. 이런 상황에서 전투가 가능할 리 없었습니다. 성 안은 난리가 났고, 바깥의 우금과 방덕도 제각기 제방이나 높은 곳으로 대피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관우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고 이미 대비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천지가 모두 물바다여서 아무도 전투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관우는 병력을 큰 배에 태워 한때 육지였던 물바다로 내보냅니다. 우금과 방덕의 병사들은 모두 제방 위에 올라가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죄다 움직이지 못하는 과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삽시간에 군사들이 죽어나가고, 남은 자들은 죄다 넙죽 엎드려 항복을 외칠뿐이었습니다. 


 

수몰된 번성과 관우의 공격


  이 상황에서도 방덕은 끝까지 분투하나 결국 타고 있던 조각배가 뒤집혀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리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합니다. 전투가 끝나자 그곳에 남은 것은 조조 군의 익사했거나 혹은 화살에 맞아 죽은 시체, 그리고 삼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포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수엄칠군(水淹七軍)입니다.


  어떤 이들은 관우가 그저 운이 좋았기에 홍수 때문에 이겼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관우가 미리 천시(天時)를 예측하고 그에 맞는 대비를 해서 거둔 승리라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우금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조가 임명한 형주자사 호수와 남향태수 부방 역시 관우에게 항복하고 맙니다, 관우는 방덕에게도 정중하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끈질기게 자신을 괴롭혔던 방덕의 능력을 인정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방덕은 응답합니다.


  “감히 어디다 대고 항복 운운이냐? 위왕께서는 병사 백만 명으로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계신다. 유비 따위가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나라를 위해 귀신이 되지, 살아서 적에게 항복하지는 않겠다.”


   결국 방덕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로써 관우의 위명은 그야말로 천하를 뒤흔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관우의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한 나머지 도읍을 허도에서 북쪽으로 옮기자는 논의를 할 지경까지 이릅니다. 일단 양번을 점령하면 그다음에는 완을 거쳐 허도까지 그야말로 대로(大路)가 뚫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이라도 허도를 공격해 올 정도로 관우의 기세가 무시무시하게 여겨졌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천도 논의에는 두 사람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바로 사마의와 장제지요. 그들이 입을 모아 말합니다. 


  “우금이 패한 건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비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도를 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는 친한 것 같으나 속으로는 사이가 나쁩니다.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장강 이남을 차지하고 있는 걸 인정해주고 대신 관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권하십시오. 그러면 번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겁니다.” 


  손권을 끌어들이자는 것. 정말 적절한 조언이었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따르기로 합니다. 밀서를 품은 사자가 동오로 달려갑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관우를 저지하는 게 급선무였죠. 일단 서황이 완으로 급파됩니다. 서황은 본래 한중 전투에서도 조조를 따라 종군했는데, 하도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쉴 틈도 없이 다시 형주로 보낸 것이죠. 서황은 우선 완에 주둔합니다. 하지만 이미 7군이 박살난 이후인지라 병력이 없어서 서황은 급한 대로 신병을 모집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한중에 있었던 유비가 다시 성도로 돌아갑니다. 한중에는 위연을 남겨 수비하도록 하죠. 조조로서는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셈이었습니다. 혹시 모를 유비의 공격을 막기 위해 그때까지 장안에 머무르고 있었거든요. 유비가 물러난 걸 확인한 조조는 서둘러서 낙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릅니다. 관우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요. 그리고 그는 관우를 저지하기 위해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 모으기 시작합니다. 

 


   한편 관우는 다시 양번을 포위하고 더욱 강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아직 물이 빠지지 않았지만, 그 점은 성 안에 갇힌 조인과 만총에게 더욱 불리한 조건이었죠. 성 안에서 사람들이 익사할 판국인데 쌀이 어디 있고 무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양양성과 번성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부하들이 배를 타고 밤중에 도망치자고 건의할 정도로요. 그러나 조인과 만총은 부하들을 격려하며 죽을힘을 다해 버팁니다. 


   여기서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오군 오현의 유서 깊은 집안 출신입니다. 본명은 육의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후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육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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