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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6.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2)

삼국지 속 전쟁들 05

219년 6월을 전후로 한 병력의 움직임


  219년. 관우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동독형주사인 자신의 관할에 속한 의도태수 맹달을 보내 방릉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유비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맹달은 자귀에서 출발하여 북상합니다. 그래서 방릉을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방릉태수 괴기를 죽이는 전과를 올리죠.  


  그리고 관우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양번을 노립니다. 다행히도 빠르게 반란을 평정한 조인은 다시 번으로 돌아와 있었죠. 그러나 상황은 관우가 우세했습니다. 관우는 단숨에 양번 두 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붓습니다. 조인은 지원을 온 여남태수 만총과 함께 죽어라 방어에 전념하죠. 이때가 대략 5월 전후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손권을 감당하지 못해 유비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관우가, 불과 5년 만에 조조의 세력과 맞짱을 뜰뿐만 아니라 역으로 적을 포위할 정도로 군세를 모았다는 의미거든요. 그것도 유비의 도움은 일절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만요. 정말 엄청난 겁니다. 어쩌면 관우의 진정한 능력은 그런 행정가적인 면모가 아니었을까요.   


  심지어 이 병력은 관우의 전력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앞서 노숙이 죽은 후 여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말씀드렸었죠. 유비와 손권이 손잡고 조조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노숙과는 달리, 여몽은 동오가 유비를 박살 내어 형주와 익주를 차지한 후에 조조와 1:1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강경파였습니다. 그런 그가 형주에 부임해 오니 관우는 단단히 경계합니다. 여몽이 겉으로는 우호를 맺고자 했고 관우도 일단 장단을 맞춰 줍니다만, 그게 눈속임이라는 걸 모를 관우가 아니었죠. 그는 양번을 공격하면서도 후방인 강릉과 공안에 수비 병력을 충분히 배치해 둡니다. 


  유비에게 도움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유비는 이때 한중에서 정말이지 영혼까지 끌어 모아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파서를 지키던 장비는 물론이요, 후방에서 반란군을 제압하던 이엄까지 불러들였지요. 심지어 이엄은 수만 명의 도적떼가 모반했는데도 병력이 없어서 겨우 5천 명으로 상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런 이엄마저 한중으로 왔다는 건 익주를 거의 텅텅 비워두다시피 하며 모든 병력을 한중에 집결시켰다는 겁니다. 마치 삼국지 게임에서 국경도시에만 병력을 모으는 것처럼 말이죠. 


  이런 정황들을 살펴보면 이런 괴이한 결론이 나옵니다. 관우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고작 형주의 1/3 가량에 지나지 않는 영토를 기반으로 모은 병력으로, 심지어 후방에 충분한 예비 병력까지 남겨둔 채, 천하의 삼분지 이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조를, 그것도 형주 방면 총사령관이자 자타공인 조조군의 에이스로 꼽히는 조인을 상대로 해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공격을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진짜 사실입니까?


   넵. 사실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조조가 당초 양양에 배치한 병력의 일부를 다른 곳으로 돌렸을 수도 있죠. 예컨대 후음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도 완에 병력을 어느 정도 남겨두어야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여남태수 만총이 조인을 도우러 왔으니만큼 그 문제도 어느 정도는 해결되지 않았을까요. 


  그럼 결론은 나옵니다. 그냥 관우가 괴물이었던 겁니다. 군사를 모으고 조련하는 일에 있어서든,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과 싸우는 일에서든 간에요. 


  정사 삼국지를 읽은 사람들은 관우의 명성에 대해 의문을 품곤 합니다. 물론 관우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워낙 부실하기는 합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관우의 패배는 꽤나 기록되어 있는 반면 승리는 의외로 적기 때문입니다. 서주에서 조조에게 항복하고, 청니에서 악진과 문빙에게 격퇴당하고, 강릉에서는 이통을 막아내는 데 실패하였고, 익양에서는 관할지의 절반 이상을 잃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반면 한중 공방전 직전 시점까지 자랑할 만한 승리는 백마에서 장료와 함께 선봉으로 출진하여 안량의 목을 따고 포위된 아군을 구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대의 인물들은 관우를 무척이나 높게 평가합니다. 주유는 자신이 관우와 장비를 지휘한다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곽가와 정욱은 관우가 만 명을 대적할 만하다고 평했죠. 유엽은 관우에게 삼군(三軍)을 뒤덮을 용맹이 있다고 했지요. 심지어 관우가 죽은 후 조비가 소집한 회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촉은 작은 국가라서 명장(名將)이라 이를 만한 자는 관우밖에 없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이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인재를 아꼈던 조조는 관우를 매우 두텁게 예우하고 크게 여겼습니다. 


  기록에 남은 형편없는 승패 전적과 동시대인들의 높은 평가 사이에 놓인 이 거대한 괴리는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적벽대전 이전까지 패배를 거듭하며 도망 다니기 바빴던 유비의 사정을 고려하면 관우에게 기록되지 않은 숨겨진 거대한 군공이 있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이렇게 해석합니다. [관우는 언제나 열세에 놓여 있으면서도 우위에 선 적을 상대로 선전했고, 때로는 심지어 그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기도 했다]고요. 


  유비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오며 실로 무수한 패배를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대신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패배가 치명적인 것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우의 능력이 여기서 빛을 발한 게 아닐까요. 소수 패잔병을 이끌어 기세 등등한 적을 막아내고 때로는 반격하며, 어떻게든 병사들을 다시 그러모아 기적같이 부활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명장 관우의 명성이 마침내 천하에 퍼진 게 아닐까요. 


  또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한 후 거둔 가장 큰 승리는 앞서 말한 백마 전투였습니다. 당시 백마는 원소의 압도적인 군세에 포위되어 그야말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절실한 상황에서 장료와 함께 관우를 보냈다는 건 그만큼 관우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관우는 그 믿음에 십분 보답했지요. 그런데 조조에게는 관우의 능력을 미리 확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비와 함께 협력해 여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유비가 서주로 와서 반기를 들었다가 박살 나고 하비를 지키던 관우가 항복하는 과정에서요. 관우의 입장에서 한 번은 승리고 한 번은 패배지만, 그때 관우가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고 조조가 그걸 눈여겨봤다고 추측해도 크게 잘못된 짐작은 아니겠죠.  


  저는 탕거 전투와 한중 전투를 다룬 지난 두 글에서, 군대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해 내용을 간략하게 적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형주 공방전은 그런 식으로 서술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언부언 말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요. 말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쓸모 있는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당시 주위의 정황과, 특히 관우의 능력과 기세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그래야만 몇 번이나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되었던 형주 공방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형주의 개략적인 세력 분포도



  자. 각설하고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우는 강릉에서 북상하여 양양과 번을 포위합니다. 지도로만 보면 감이 잘 안 오지만, 강릉에서 양양까지는 200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중국 대륙의 크기라는 게 워낙 광대해서 말이지요. 


  관우는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함께 진군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양양에서 강릉으로 이어지는 장강의 지류(支流)가 있는데 이름은 한수(漢水)라고 합니다. 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간 거죠. 형주에는 장강과 그 지류들이 흐르고 있었기에 유표 시절부터 형주의 수군은 꽤나 유명했습니다. 관우 역시 수군을 중요시했고요. 특히 번성과 양양성의 위치를 보면 수군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양번(양양성과 번성)의 지도


   번성과 양양성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의지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른바 공성전(攻城戰)은 화약무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항상 수비하는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공성전은 몇 달이나 심지어 연(年) 단위로 지속되기 일쑤였죠. 공격하는 쪽에서 아무리 병력과 무기를 투입해도 항상 손해가 막심했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는 성 안 사람들을 ‘굶겨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성 안에 아무리 물자와 양곡이 많다고 해도 외부에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모두 소모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굶어 죽은 병사들로는 적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양양성과 번성은 천혜의 요새라 할 만했습니다. 일단 어느 한쪽이 포위되더라도 반대쪽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한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배를 이용하여 서로에게 물자를 공급해 줄 수도 있습니다. 강을 끼고 있었기에 수비에 유리했고, 설령 양쪽이 모두 포위되더라도 수군을 통해 강을 장악한다면 멀리서도 물자를 운송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두 성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육군을 동원하여 두 성을 한꺼번에 포위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군을 운용하여 한수를 장악함으로써 상대의 수로 이용을 막아야 합니다. 정말 까다로운 조건인 거죠. 


  그리고 관우는 이걸 해냅니다.

 

  조인은 부장(副將)인 여상을 양양성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만총, 방덕과 함께 번성을 수비합니다. 관우는 병력을 총동원해 두 성을 포위하고 한수를 장악하죠. 두 성은 고립되었습니다. 그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굶어 죽는 결말뿐이었죠. 물론 아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조인은 조조에게 긴급히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 때 조조는 결국 한중에서 패한 후 5월에 장안으로 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유비는 내친김에 이엄과 유봉을 보내 맹달과 함께 상용을 동서에서 협격하도록 합니다. 상용태수 신탐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해 오지요.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상용에 눌러 앉힙니다. 그러나 조조는 상용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당장 형주에서 조인이 죽는소리를 내고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형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세를 탄 유비가 한중에서 뛰쳐나와 장안까지 공격한다면 정말 큰일이었으니까요. 잘못하면 관중 지방이 통째로 유비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 결국 조조는 자신은 장안에 눌러앉아 당분간 유비를 견제하기로 결정합니다. 대신 그는 가장 신뢰하는 장수 중 한 명에게 중임을 맡겼습니다. 


  7월. 조조는 좌장군 우금에게 7군을 맡겨 조인을 지원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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