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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26. 2019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1)

삼국지 속 전쟁들 04

  219년 후반에 벌어진 형주 공방전을 재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난점은 사건의 순서가 정확치 않다는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관우가 개고생하고 있을 때 형인 유비는 대체 뭐 하고 있었음?’이라는 의문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자들은 제갈량이 세력 내 이인자인 관우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패배를 묵인했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하기도 했었죠. 물론 그게 사실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습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료는 몹시 한정적이고 우리는 많은 추측을 동원하여 그 빈자리를 채워 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의 출처는 http://blog.naver.com/sjkim2090 이며 별도의 표시를 덧붙임. 이하 전편 동일.


   우선 한중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한중에서 유비는 조조와 일전을 벌이지요. 217년 10월의 하변 습격에서부터 시작된 이 싸움은 장소를 바꿔 가며 1년이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219년 1월, 황충이 조조의 서부 방면 총사령관인 하후연의 목을 날려버립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마침내 장안에서 출발하여 한중에 도달하죠. 두 사람이 직접 이끄는 병력이 봄에서 여름에 걸쳐 한중에서 일전일퇴의 공방을 벌입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한 쪽은 유비였죠. 조조는 퇴각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는데 이때가 5월입니다. 승리한 유비는 219년 7월에 한중왕에 등극합니다.


  이때 이미 관우는 양번(양양과 번)을 포위하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죠. 애당초 관우는 왜 북진하여 양번을 공격했을까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조조가 대병력을 이끌고 한중으로 갔으니 그 빈틈을 노려서 남쪽을 공격했다는 것. 둘째는 반대로 조조가 한중에만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유비가 관우에게 명령해 형주를 들쑤시라고 했다는 것. 저는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시 관우에게 단독 작전권이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다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유비는 평생에 걸쳐 언제나 자신의 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관우라는 사내는 유비가 도망쳐 생사조차 모르게 되자 조조에게 항복해 극진한 대우를 받았지만, 유비의 소식을 듣고는 그 모든 부귀와 영화를 내던진 채 다시 돌아간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유비의 명령도 없이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대형 사고를 쳤다고는 생각하기 어렵죠. 더군다나 유비가 한중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을 때에 말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게임처럼 버튼 몇 개 눌러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방에 흩어져 농사를 짓고 있던 병력을 불러 모으고, 무기와 양곡을 준비하고, 기타 군수물자들을 완비해야 하죠. 전쟁을 일으키려면 준비 시간이 필요합니다. 강릉에서 양양까지 진격하는 시간도 감안해야 하고요. 그러면 양양과 번을 공격하겠다는 결정은 유비가 한중에서 한참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이미 관우에게 전달되었을 겁니다. 


  그럼 결론은 자명하지요. 유비는 관우가 형주 일대를 뒤흔들어주기를 원했고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한중에서의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이끌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관우는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죠. 이 논리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사건을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218년 말에서 219년 초 사이. 한중에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던 와중에 유비는 관우에게 명령합니다. 

   “조조가 한중으로 온다더라. 걔가 한중에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네가 후방을 좀 공격해 다오.”


  이때 번에 주둔하여 형주 일대의 방위를 맡고 있었던 위나라의 장수는 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18년 10월에 완에서 후음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너무 과중했던 요역이 원인이었습니다. 태수를 붙잡고 성을 점거했죠. 그가 관우와의 연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조조는 따로 토벌군을 편성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형주에 있던 조인더러 완의 후음을 토벌하라고 명령합니다. 십중팔구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연초부터 수도인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었습니다. 여름에는 북쪽 오환족도 반란을 일으켰고 동쪽의 손권 역시 얕볼 수 없었지요. 게다가 조조 자신은 일생일대의 적수인 유비와의 결착을 내기 위해 멀리 장안까지 가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전쟁을 위해 병력을 억지로 징발하니 그 때문에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죠. 그야말로 반란의 왕국이라고나 할까요. 이때 반란을 일으킨 이들 중 손랑이라는 자는 관우에게 벼슬과 함께 병력까지 지원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급한 대로 아랫돌을 빼어 윗돌을 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껏 번성에서 관우를 견제하고 있었던 조인은 다시 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방덕과 함께 성을 공격하여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하죠. 219년 1월의 일입니다. 


   관우의 입장에서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겁니다. 자신을 견제하고 있던 조인이 북쪽으로 갔단 말이지요. 드디어 수년간 갈고닦았던 칼을 휘두를 기회가 온 것입니다. 


 


  자. 이 시점에서 잠시 시계를 되돌려 보겠습니다. 8년 전인 211년입니다. 그때 유비는 유장의 요청을 받고 익주로 들어갔습니다. 차지한 지 얼마 안 된 소중한 기반인 형주를 지키기 위해 관우를 동독형주사(董督荊州事. 형주의 일을 도맡는다는 뜻)로 삼고 장비와 제갈량을 함께 남겼죠. 하지만 이듬해 유장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유비는 유장과 한판 붙게 됩니다. 그러면서 유비는 본진에 급히 지원을 요청합니다. 


  아무리 형주가 중요하다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유비는 형주에 남은 전력 대다수를 익주로 불러들였습니다. 제갈량과 장비, 조운이 병력을 나누어 이끌고 익주로 진격해 가죠. 형주에는 관우 홀로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청니에서 악진의 군사들과 대치하며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의형이라는 자가 인재와 병력을 대부분 가져가면서 형주에 홀로 남게 된 관우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지 짐작이 가십니까? 그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만 거대한 조조의 세력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손권 역시 명색이 동맹관계였지만 실제로는 적이었죠. 실제로 214년에 손권이 여몽과 노숙을 앞세워 형주를 공격해 오자 관우는 순식간에 밀립니다. 당시 관우가 관장하는 형주의 영역이 남군, 무릉, 장사, 영릉, 계양 일대인데 이중 장사+영릉+계양 세 군이 순식간에 손권에게 넘어갑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기에 익주를 차지한 지 얼마 안 된 유비가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형주까지 왔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이른바 익양대치라고 합니다. 


  다행히도 익양대치는 유비가 한발 물러나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손권과 화해한 거죠. 조조의 영역인 형주 북쪽을 제외한 중남부 일대를 세로로 잘라서 서쪽인 남군, 무릉, 영릉은 유비의 소유가 되고 동쪽인 강하, 장사, 계양은 손권의 차지가 되는 것으로 상호 간에 합의를 봅니다. 이후 노숙이 죽고 후임으로 여몽이 오자, 그에게 된통 당한 경험을 잊지 않은 관우는 성을 새로 쌓고 국경을 따라 초소를 여럿 설치하는 등 만반의 대비를 갖춥니다. 


  그러면서 관우는 힘을 모읍니다.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그리고 엄청난 노력으로.


  그런 상황에서 유비의 진격 명령은 관우에게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그동안 감내해야 했던 굴욕을 되갚아줄 때가 드디어 도래한 거죠. 바야흐로 219년, 관우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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