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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15. 2019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3)

삼국지 속 전쟁들 12

 

   일단 지도를 보시죠. 주황색으로 표시한 곳 왼쪽이 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했을 당시 유비의 영토입니다. 이후 손권의 뒤통수와 관우의 죽음, 그리고 맹달의 배신 등으로 인해 유비의 영역이 붉은 선까지 축소되지요. 유비가 얼마나 많은 영토를 잃었는지 한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 있어 유비의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손권의 목을 베고 동오를 점령하는 건 아니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전쟁을 통해 적어도 상실했던 저 영토만큼은 다시 회복하려 했겠지요. 상용이야 이미 위나라의 손에 넘어갔으니만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남군/무릉군/영릉군 등 세 군은 되찾고 싶었을 겁니다. 


   전쟁의 초반 주도권은 유비의 손에 있었습니다. 평생 전장을 누벼온 늙은 황제는 조운을 후방인 강주에 남겨둔 후 장강을 따라 동진합니다. 육군과 수군이 함께 진격했죠. 저 물길은 이른바 삼협(三峽)이라 불리는 곳인데 험준한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살이 무척이나 거세고 빠른 곳입니다. 그 물길을 따라 어복현까지는 유비의 영토였고, 동쪽으로 더 나아가면 219년 이후 손권의 땅이 된 무현과 자귀현이 있습니다. 이곳은 유비가 손권을 공격할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통로나 다름없었기에 손권 역시 믿음직한 장수를 배치해 두었지요. 바로 육손입니다. 


   하지만 1년 반 동안 절치부심하여 준비한 유비의 대병력은 물경 4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육손은 적을 저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후 물러납니다. 물론 무작정 도망친 건 아니고 도중에 유비를 저지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만 오반과 풍습에게 격파당합니다. 오반과 풍습은 무현에 이어 자귀까지 점령하지요. 유비는 동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온전히 확보했습니다. 

 



   이때 본래 관우의 부하였다가 손권에게 사로잡힌 후, 병으로 죽은 척하고 탈출해서 서쪽으로 오고 있던 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순. 이후 바꾼 이름은 요화입니다. 양양의 대가문 출신이었으며 황건적의 잔당과는 아무 관련 없습니다. 유비는 그를 의도태수로 임명한 후 한 부대를 맡겨 전장에 동행합니다.  


[참고자료] https://brunch.co.kr/@gorgom/53


   손권의 대응도 신속했습니다. 일단 조비에게 칭신(稱臣)하며 구원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조비는 손권을 대장군(大將軍)에다 오왕(吳王)으로 임명하고 무려 구석까지 내리면서도 막상 손권이 갈망했던 구원병은 보내지 않습니다. 너희들끼리 한번 치고받아 보라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거죠. 손권은 혼자의 힘으로 유비를 상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비가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손권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려 5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그러모아 반격에 나섭니다. 대도독으로 임명된 인물은 지난날 형주 공방전에서 여몽과 함께 큰 공을 세웠던 육손이었습니다. 게다가 주연, 반장, 한당, 서성, 손환, 송겸 등 쟁쟁한 장수들을 최대한 동원했습니다. 병력의 수에 있어서든 장수들의 진용에 있어서든 간에, 이 전쟁은 분명 오나라가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승세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신중하게 움직입니다. 무에서 자귀를 통해 이릉까지 나아가며 중간중간에 둔영을 수십 개나 세워서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만전을 기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이릉에 도달하자 험준한 산에 의지하여 목책을 세우고 진영을 구축하며 방비를 튼튼히 합니다. 오서 육손전을 보면 보광, 조융, 요순, 부융 등을 별독(別督)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각기 요충지를 점령하게 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육손의 대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오의 장수들은 모두들 반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육손은 거부했죠. 유비의 기세가 대단한 데다 이미 요충지를 점거하여 있으니 쉽게 이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전략적으로는 옳은 판단입니다. 유비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고 보급선은 길게 늘어나 있으니만큼 이대로 대치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동오가 유리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장수들은 거세게 반발합니다.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적을 당장 격파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총사령관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주연, 반장, 한당 등은 모두 육손보다 경력이나 전공이 한참 많은 장수들이었죠. 결국 육손은 칼을 쥐고 군령까지 들먹이며 부하들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전황은 신중한 유비와 그보다 더 신중한 육손의 대결 구도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비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220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무릉군에서 번주라는 자가 손권에게 반란을 일으켰죠. 그는 무릉에 사는 이민족들인 무릉만이(武陵蠻夷)들과 연합하여 유비에게 귀순하려 했습니다. 이들의 기세는 대단하여 손권의 부하들이 병사 일만 명은 보내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우려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221년에는 영릉에 있는 습진이라는 자도 호응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관우의 부하였던 습진은 관우가 죽었을 때 홀로 손권에게 저항하다가 동생의 설득으로 거짓 투항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다 번주가 반기를 들고 유비가 동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때가 왔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킨 거지요. 여담이지만 이 인물은 작금 중국의 황제인 습근평의 까마득히 먼 조상이기도 합니다. 

 

   유비는 여기에다 무릉만이들에게 금과 은과 비단 등을 내리고 벼슬을 주면서 회유합니다. 이 무릉만이들은 오계 지역에 살았다 해서 오계만이(五谿蠻夷)라고도 하는데, 오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오나라와 대립했습니다. 무릉만이가 반란을 일으키면 오나라는 창칼로 진압하는 식이었죠. 반면 이민족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였던 유비와의 사이는 상대적으로 좋았던 걸로 보입니다. 그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는 임무를 맡은 자가 바로 시중(侍中) 마량입니다. 제갈량이 친동생처럼 아꼈던 인재이자 어떤 등산가의 친형이지요. 


   마량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내어 무릉만이 다수가 유비의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사마가입니다. 본래 손권보다 병력이 적었던 유비였지만, 무릉만이들의 가세로 인해 오히려 병력이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비가 먼저 응수타진에 나섭니다. 산비탈에 주둔해 있던 오반의 병력 수천 명이 평지로 나왔죠. 몸이 달아 있던 동오의 장수들은 즉시 요격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육손은 여전히 신중했습니다. 유비의 속임수라고 확신하고 부하들의 출격을 막았지요. 실상 육손의 예측이 옳았습니다. 유비가 산골짜기 어둑한 곳에 복병을 팔천 명이나 숨겨두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육손이 반응하지 않자 유비의 계책 또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서로 지루한 대치를 지속하는 동안 220년이 차츰 저물어 갔습니다. 전쟁을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흘렀지요. 그리고 해가 바뀌어 221년 정월, 봄이 찾아온 것과 동시에 유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뜻밖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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