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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16. 2019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4)

삼국지 속 전쟁들 13

  222년 1월. 이릉에서 육손과 맞서고 있던 유비가 갑작스레 자귀로 물러납니다. 혼자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이끌고 있던 부대 대부분이 함께 후퇴했습니다. 다만 장군 오반과 진식의 수군만을 남겨 장강의 동서 연안에 주둔시켜 놓았을 따름이었습니다. 놀라운 움직임이었지요. 유비가 자귀로 물러났다는 건 아무래도 유비가 형주를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모양새였으니까 말입니다.


    같은 달에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육손의 부하 장수 중 송겸이 출진하여 촉의 둔영 다섯 곳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했습니다. 육손이 그동안 부하들의 출진을 엄금했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이 전투는 유비의 움직임이 의아했던 육손이 시험 삼아 병력을 내보내서 벌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거나 송겸의 승리는 동오의 장수들에게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길었던 전쟁이 마침내 동오의 승리로 끝났다고 누군가는 성급한 지레짐작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222년 1월


   그러나 2월. 반전이 일어납니다.


   자귀로 돌아갔던 유비는 직접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험한 산을 넘어 이도로 진격합니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이릉에서의 대치가 길어지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책을 쓴 것이었지요. 그렇게 보면 1월에 있었던 송겸의 승리도 어쩌면 유비의 유인책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때 황권은 자신이 선봉에 설 테니 유비는 뒤에 있으라고 간언 합니다. 한 번 진격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만큼 행여나 천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비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최전선에서 싸운 유비입니다. 부하를 보내 놓은 후 뒤에 숨어 있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유비는 스스로 장강 이남으로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황권을 진북장군(鎭北將軍), 즉 북쪽을 수비하는 장군으로 임명한 후 장강 북쪽으로 보내 조비를 견제하도록 했습니다. 손권이 조비에게 귀부했으니만큼 조비가 신하를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공격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비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부지리를 노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꽤나 멍청한 선택이었습니다. 이때 유엽 같은 이는 오히려 유비가 손권을 공격하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권의 후방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비는 이 주장도 물리칩니다. 기껏 항복해 온 자의 뒤통수를 치면 천하의 인심을 잃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지요.  

 

222년 2월


   여하튼 단숨에 적진 깊숙이 진출한 유비는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하며 효정이라는 곳에 주둔합니다. 육손전의 기록에는 손환이 홀로 이도에서 유비의 선봉대를 공격하려다가 오히려 포위당했다고 합니다. 손환은 손씨 일가의 젊은 장수였는데 비록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손권이 워낙 아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손환이 육손의 지시를 무시하고 함부로 나대다가 된통 당한 게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육손은 손환을 구원하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계책이 이루어지면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라 큰소리를 치죠.


   여기서 유비가 손환을 격파하고 이도를 완전히 점령했다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결국 손환의 숨통을 끊어놓지 못합니다. 산을 넘어와 적의 의표를 찌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험준한 길을 지나느라 공성병기를 지니고 올 수 없었겠지요. 손환은 끝내 성을 지키면서 버텨냈고 결국 유비는 이도에서 발목이 잡혀 버리고 맙니다.




   자. 이렇게 되니 이제 난처해진 쪽은 오히려 유비였습니다. 적진에 침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보급로가 길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도 황권이 장강 북쪽에서 오나라의 군사들과 맞서며 장강을 통한 보급로를 지켜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비는 이때쯤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수군들을 모두 육지로 올렸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육군을 충원하여 적을 격파하기 위함이었겠지요. 하지만 그런 과감한 수를 썼음에도 유비는 결국 상대에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했습니다. 잔뜩 웅크리고 또 웅크렸던 육손의 선택이 옳았음이 증명되고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유비는 또다시 반년 동안이나 별다른 성과 없이 대치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보급로는 길게 늘어나 있었고 그 보급로를 지키느라 또 여러 곳에 군사를 나누어 진영을 구축해야 했습니다. 병력이 분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서 육손전을 살펴보면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무협에서부터 이릉에 이르기까지 수십 곳의 둔영을 세웠다고 합니다. 위서 문제기를 보면 이후 그 보급로는 (이도까지) 더 길게 늘어나서 칠백 리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부산에서 광주에 이르는 거리입니다. 그 보급로를 지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유비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키기 좋은 요충지를 선점하고 고지대에 의지해서 튼튼하게 목책을 치며 진영을 구축했죠. 그런 진영이 보급로를 따라 수십 개나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유비는 여전히 자신이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보급로는 확보하고 있었고, 이대로 이도에서 손환을 포위하고 있으면 성은 언젠가 함락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면 이도를 교두보로 삼아 다음 단계의 작전을 펴 나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이도에 눌러앉으면서 번주나 습진, 무릉만이 등과도 연계할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가지로 가능성은 있었지요.


   하지만 육손에게는 비책이 있었습니다.

 

222년 6월



   222년 6월. 한여름에 육손은 손권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그리고는 유비를 공격하겠다고 하죠. 부하들은 놀랍니다. 그리고 다들 육손을 뜯어말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전쟁 초반에 무조건 공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냐. 지금은 유비가 오나라 영토 깊숙한 곳까지 오륙백 리나 들어왔고, 또 요충지를 차지하고 단단히 지킨 지 벌써 일고여덟 달이나 지났다. 그러니 이제 와서 공격해 봤자 상대하기 어렵다. 그런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방어에만 전념하던 육손이 이번에는 뜻밖에도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말하죠.

   “유비는 교활하고 또 경험 많은 자다. 전쟁 초반에는 기세가 대단했고 계책도 있었기에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공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도록 서로 대치하면서 처음의 기세가 모두 꺾였다. 또 병사들도 지쳐 사기가 떨어졌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할 때다.”


   윤 6월. 육손은 한 갈래 병사를 내보내 유비의 진영 한 곳을 찔러봅니다. 하지만 그 공격은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유비에게 격퇴당했습니다. 과거 한중 공방전에서도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조조의 매서운 공격을 막아내던 유비입니다. 육손의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부하 장수들이 불만스러워하며 또다시 말했지요. 헛되이 병사들만 죽게 하지 말고 그만둡시다. 그러나 육손은 여전히 큰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이미 유비를 격파할 방법을 알고 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


    육손은 병사들에게 풀 말린 불쏘시개를 한 다발씩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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