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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17. 2019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5)

삼국지 속 전쟁들 14

  육손의 선택은 불을 이용한 화공이었습니다. 당시는 윤 6월. 음력이기에 대략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입니다. 날씨가 비교적 건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유비는 고지대를 점거하고 목책을 세워 방어하고 있었죠. 목책은 불에 타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공은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당시 유비의 진영은 자귀에서 이릉을 거쳐 이도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나 길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위서 문제기를 보면 목책으로 진영을 칠백 리를 이었다고(樹柵連營七百餘里) 하지요. 조비는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는 유비가 군사 부리는 법을 모른다고 비웃으며 손권의 승리를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의의 묘사처럼 칠백 리에 걸쳐 늘어진 진영이 불 한 방에 잿더미가 된 건 아닙니다. 칠백 리면 무려 280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리인데 이걸 한꺼번에 태워버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요. 오서 육손전에는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동시에 공격했다(通率諸軍同時俱攻)고 묘사되어 있는데, 여러 요충지에 나누어져 있던 유비의 군사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각개격파를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유리한 곳에 있는 적을 향해 무작정 들이받는 건 어리석은 일인데 그걸 보완하고자 불을 사용한 거죠. 불을 질러버리면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육손의 계략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40여 개의 둔영이 순식간에 괴멸되었고, 유비의 대독 풍습과 선봉장 장남의 목이 달아납니다. 무릉만이를 이끌고 지원을 온 사마가도 함께 죽었죠. 두로와 유녕은 육손에게 항복하고요. 죽은 장수들의 직책만 보아도 유비의 본대, 그중에서도 이도 방면으로 돌출한 부대는 거의 박살나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 패한 유비는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도에서 포위되어 있던 손환마저 그동안 당한 원한을 갚고자 역공에 나섰습니다. 손환은 탈출로를 먼저 차단하고 유비를 사로잡으려 시도했는데, 유비는 험한 산을 넘어서 가까스로 도망칩니다. 그러면서도 굴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반격을 시도했지요. 한참을 후퇴하다가 이릉 인근에 이르러 마안산이라는 곳에 병력을 집결시켰습니다. 하지만 육손은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흩어진 병력을 한데 모아 마안산을 포위한 후 맹공을 퍼붓습니다. 이미 사기가 크게 떨어진 데다 숫자마저 줄어든 유비의 병력은 도저히 그 공격을 감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진영이 와해되고 무수한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유비는 밤을 틈타 또다시 도망칩니다. 그러나 육손의 추격병들이 매우 가까이까지 육박해 오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죠. 이때 한 역참의 이름 모를 관리가 유비를 구원합니다. 그 관리는 역참에 보관되어 있던 군수물자들을 끌어내 길 한복판에다 쌓아 놓고 불을 질러 길을 차단했습니다. 그 틈에 유비는 간신히 몸을 피해 백제성까지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유비가 살아났을 뿐, 촉한의 손실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습니다. 무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이 그야말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지요. 비단 이도에서 죽은 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육손의 추격이 얼마나 급박했던지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지요. 


    부융은 본래 별독으로 한 부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후퇴 과정에서 후미를 맡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미를 맡았다는 건 곧 사지로 들어갔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죠. 휘하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해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오나라의 군사들이 투항을 권유하죠. 부융은 욕설로 대답합니다. 

   “한나라의 장군이 어찌 동오의 개자식들에게 항복할 수 있겠느냐!”

   그는 그렇게 유비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종사좨주로 유비를 수행하던 정기라는 자는 강을 거슬러 퇴각하다 동오의 배들에게 따라잡힙니다. 부하들은 배를 버리고 빨리 도망치자고 진언하죠. 그러나 정기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나는 군문에 든 이래로 적 앞에서 도망치는 일을 배운 적이 없다. 하물며 천자를 수행하다 위험을 만난 때가 아니더냐!”

   그는 오히려 배를 돌려 직접 극을 쥐고 동오와 맞붙습니다. 부하들도 감명받았는지 죽을힘을 다해 싸워 오히려 동오의 배 몇 척을 가라앉히기까지 했죠. 하지만 중과부적인지라 결국 정기 또한 죽고 맙니다. 


   마량. 형주에서도 손꼽히는 재사(才士)이자 제갈량을 공공연히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그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릉만이들을 설득하러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기에 본대가 패하자 제때 몸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황권. 진북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장강 북쪽에 주둔해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서쪽으로 돌아갈 길이 끊겨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황권은 이끌고 있던 부하와 병사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가 위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조비는 그를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후 황권은 무려 거기장군이라는 높은 직위까지 승진합니다. 사마의 또한 그를 무척이나 중히 여겼다고 하지요. 


   황권에 대해서는 약간의 여담이 더 남아 있습니다. 유비는 얼마 후 황권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항복한 이상 남아 있는 가족들을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내가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그가 나를 저버린 게 아니다.”

   한편 황권 역시도 유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가족이 처형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조비가 상을 치르라고 권했는데 황권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은 유비, 제갈량과 성심으로 서로 믿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저의 진심을 알고 있을 것이니 그 소문이 사실일 리 없습니다.”


   유비가 패퇴하자 그와 호응하려 했던 형주의 옛 신하들도 차례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한때 엄청나게 기세를 올렸던 영릉의 번주는 반준과 보즐에게 토벌당하지요. 영릉의 습진 또한 반준에게 패한 끝에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산으로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반준이 그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습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한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오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

   결국 그는 끝까지 싸우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자결하고 맙니다. 




    그런 무수한 희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유비는 얼마 안 되는 잔여 병력을 그러모아 어복현의 백제성으로 돌아갑니다. 동오를 정벌하기 위해 출발한 바로 그곳으로 일 년 만에 되돌아오게 된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유비는 성도의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요충지인 백제성에 그대로 주둔해 있기를 택했지요. 그리고 어복현의 이름을 영안현으로 바꾸고 백제성을 자신의 황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기에 백제성을 영안궁이라고도 부릅니다. 


   어째서 그랬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요충지에서 육손의 추격을 막아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도 적장 이이와 유아 등이 그의 턱밑까지 육박해 온 상황이었거든요. 백제성마저 뚫려버린다면 자칫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비가 백제성을 사수하기로 한 건 나름대로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도 부끄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일생에 걸쳐 가장 참혹한 대패를 당했을 뿐만 아니라 갓 건국된 나라의 국력 대부분을 이 싸움에서 소진해버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볼 면목이 없었기에 그대로 백제성에 눌러앉은 게 아닐지, 저는 그렇게 짐작합니다. 


   유비가 얼마 안 되는 병력과 함께 백제성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동오의 장수들은 공격을 허락해 달라고 손권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나 육손이 반대하죠. 조비가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손권은 그 말에 따라 병력을 물립니다. 실제로도 조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오를 공격해 왔습니다만, 그 전쟁은 이번 이야기에서 따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한편 위급한 유비를 구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강주에 주둔해 있던 조운은 유비가 패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병하여 백제성에 당도하죠. 다행히도 동오의 병력은 이미 물러났기에 더 이상의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파서태수 염지도 군사 오천 명을 급하게 징발하여 호독이란 자에게 맡겨 백제성으로 보냈습니다. 유비는 호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이렇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비록 황권을 잃었지만 대신 호독을 얻었다. 과연 세상에 현인이 부족하지 않구나!”

   이 호독이란 인물은 추후 이름을 마충으로 개명하고 촉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이릉 전투는 유비의 대패로 끝났습니다. 많은 인재와 병력과 물자를 상실한 반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촉한이 몇 년에 걸쳐 쌓아 올린 것들이 한꺼번에 증발해 버렸고 단지 얼마 되지 않는 병력만이 남겨져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유비의 이릉 공격을 어리석은 짓으로 폄하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유비의 잘못은 몹시도 큽니다. 하지만 전쟁을 감행한 것 자체를 잘못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패배, 그것도 실로 엄청난 참패를 당한 것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잘못이었지요. 오로지 결과에 따라 선행되는 판단의 옳고 그름이 결정지어지는 역설은 어쩌면 역사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비는 밀려오는 참담함을 이길 수 없었던지 병에 걸려 눕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지요. 한가태수 황원이 반기를 들었고, 예전부터 유비에게 적대적이었던 남중의 대호족 옹개 또한 반란을 일으킵니다. 장가군의 태수 주포와 월수군의 이민족 수령 고정까지 연계되어 무려 네 개 군에 걸쳐 일어난 거대한 반란이었죠. 건국된 지 고작 두 해도 되지 않은 촉한은 그야말로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223년, 성도에서 유비를 대리하여 나랏일을 처리하고 있던 승상 제갈량이 부름을 받고 백제성으로 왔습니다. 유비는 뒷일을 제갈량에게 맡기고 마침내 눈을 감습니다. 이로써 촉한의 미래는 제갈량의 두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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