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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Nov 14. 2019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2)

삼국지 속 전쟁들 11

  장비가 어째서 죽었는지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유비가 동오를 정벌할 때 장비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강주에서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러기 전에 부하 장달과 범강이 장비를 죽이고 강을 따라 내려가 손권에게 항복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다만 유비가 평소 장비의 난폭한 성품에 대해 우려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지나칠 정도인 데다, 또 부하들을 자주 채찍질하면서도 그들을 여전히 좌우에 두고 있소. 이는 화를 초래하는 일이오.”  [촉서 장비전]

   이 짤막한 문장에서 장비가 평소 얼마나 사졸들을 가혹하게 대했는지 엿볼 수 있지요. 


   하지만 부하가 상관을 죽인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목이 달아날 일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거기장군씩이나 되는 까마득하게 높은 장군을 죽이고 적에게 항복하는 일이 벌어지는 건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원래부터 장비에게 원한이 있던 장달과 범강을 손권이 회유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비와의 전쟁을 예감하고 있었기에 사전에 손을 써 두었고 그게 손권에게는 최선의 결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은 거죠. 마치 219년의 형주 공방전처럼 말입니다. 그때도 손권은 관우를 공격하기 전에 미리 물밑작업을 해 두었고, 그 결과 미방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었지요. 그렇게 보면 손권은 그런 부류의 공작에 꽤 능했던 모양입니다. 


   어찌 되었든 장비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었습니다. 관우와 함께 수십 년간 유비를 충심으로 섬겨 온 의형제 같은 신하요, 동시에 나라의 병력을 총괄하는 장군이었습니다. 당시 촉한은 대장군이 없었고 표기장군 마초는 량주목(涼州牧)에 임명되어 북쪽의 일을 맡아보고 있었죠. 더군다나 이듬해에 47세로 세상을 떠난 걸로 미루어보아 마초는 이 시점에서 병에 걸려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황제 유비의 휘하에서 실질적으로 동오 정벌군을 총지휘해야 하는 건 거기장군 장비의 역할이었습니다. 

 

   게다가 개전 이후 유비의 움직임을 보면 자신의 본대와는 별도로 군사를 나누어 보낸 일이 잦았는데 장비는 그런 임무에도 적격이었습니다. 강주에서는 엄안을 사로잡고 파서에서는 장합을 때려눕힌 숙장(宿將)이었으니까요. 또 위나라의 신하들이 관우와 더불어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지요. 그런 장비가 세상을 떠났으니만큼 유비는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최고급 지휘관을 잃은 셈이었습니다. 


   나라가 크게 술렁였습니다. 




   유비의 동오 정벌이 불가피했다는 건 지난 편에서 설명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밀 같은 이들은 천시(天時)가 유리하지 않다며 반대합니다. 아마도 장비의 죽음 때문에 그런 반대 여론이 일어난 게 아닌가 하고 저는 추측합니다. 하지만 유비의 대답은 진밀을 감옥에 처넣는 것이었습니다. 


   조운도 반대했습니다. 그는 손권과 싸우는 중에 조비가 공격해 오면 위급해지니 손권을 공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조비야말로 황위를 찬탈한 역적이니만큼 그를 먼저 쳐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운이야 워낙 오랫동안 유비를 섬겨 온 충신인 데다 무수한 공훈이 있었으니만큼 진밀처럼 하옥되는 일은 없었지만요. 

 

   장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동오 정벌을 감행할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비의 의지가 확고하다 해도, 또 제아무리 유비가 뛰어난 지휘관이라 해도, 전쟁을 혼자 치를 수는 없습니다. 유비의 휘하에서 개별 부대를 지휘하고 또 때로는 별동대를 이끌 장수들이 여럿 필요했지요. 그런데 그럴 만한 장수가 부족했습니다. 

 

   관우와 장비는 죽었죠. 마초는 앞서 설명드렸습니다. 황충은 이미 2년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연은 한중태수로 한중을 진수하고 있었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습니다. 오일(오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관중도독으로 북쪽 일을 맡아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손권과 싸우는 틈을 노려 조비가 쳐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유비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걸 감안하면 유비는 북쪽의 방비에 최대한의 인력을 투입한 셈입니다. 마초+위연+오일이 모두 북쪽을 지키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문에 막상 유비 자신이 데려갈 장수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또 참모진도 부족했습니다. 제갈량은 당연히 나라를 지켜야 하니 성도에 남아 있어야 했죠. 법정은 22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껏해야 황권 정도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유비는 풍습을 대독(大督)으로 임명하고 장남을 선봉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진식, 오반, 부융, 상총, 보광, 조융 등에게 개별 부대의 지휘를 맡깁니다. 낯선 이름들이지요. 풍습과 장남은 형주 출신으로 유비의 입촉 때 공을 세웠습니다. 상총과 부융 역시 형주 출신입니다. 진식은 한중 공방전 때 서황에게 패한 적이 있으며, 오반은 익주 출신이자 황실의 외척이었지요. 보광은 이엄과 관위나 나이가 비슷했다고 합니다. 조융은 아예 기록이 없습니다. 


   유비에게는 아마도 최선을 다한 인선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동오 정벌에는 말 그대로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래도 관장마황조 다섯 사람에 비하면 무게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장비의 죽음은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지요.   


   그래서 조운을 데려가지 않은 점이 안타깝습니다. 유비는 그에게 강주에 주둔하라 지시하여 후방으로 돌려 버렸습니다. 물론 그 역할도 중요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패한다면 강주 방면으로 후퇴해야 하니 조운은 유사시를 대비한 최후의 버팀목인 셈이죠.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만한 경력이 있는 장수를 단지 예비대로 쓰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운이 전쟁 반대파였기에 유비가 데려가지 않았다는 식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진실은 아무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미처 출정하기도 전에 촉한의 기세는 크게 꺾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비가 죽음을 맞이한 다음 달, 221년 7월에 유비는 4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마침내 친정을 감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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