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짜리 제주도 보름 여행 - 열째 날
점심은 동네 이름부터가 정겨운 종달리에서 먹었다. 어째서 오전은 생략한 채 다짜고짜 점심부터 시작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직 나라는 사람의 게으름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게 틀림없다. 아인슈타인이 하루에 열한 시간씩 잤다는 출처 모를 이야기는 내게 있어 신앙이요, 거룩한 경전이다. 물론 내가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처럼 잠꾸러기가 될 수는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 위대한 과학자를 다만 절반이라도 본받고자 할 따름이다.
여하튼 밥만 먹으러 종달리까지 온 건 아니다. 진짜 목적은 조그만 서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손바닥 두 개쯤 되는 좁아빠진 공간에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 지난 세기에는 간혹 존재했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용각류 공룡처럼 멸종해버린 ‘동네 서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기에 겉모습만으로도 반갑기 그지없지만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욱 마음이 설렌다. 이곳은 지극히도 개인화된 서점인 까닭이다.
무척이나 작은 공간이다 보니 장서의 양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가져다 놓는 책들은 자연스레 주인의 안목과 선택을 따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방문하는 대형 서점과는 달리, 서점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존재처럼 일관된 경향성 하에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다. 이 조그만 서점의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면 주인장의 취향과 관심사와 성격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이 서점은 곧 주인이 관심을 기울이는 책들의 집합체이며 동시에 그 주인 자체나 다름없다. 이곳은 작은 우주다.
예전에 내 꿈은 은퇴하고 나서 조그만 책방 하나를 차리는 것이었다. 물론 조그만 책방이니만큼 책장은 모두 내 취향에 맞는 것들로만 채워질 예정이었다. 삼백 페이지에 걸쳐 동일한 말을 무한 반복하며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려 드는 자기계발서와, 자의식 과잉이 넘쳐흐르다 못해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느라 바쁜 얼뜨기 에세이 따위는 절대 출입 금지다. 대신 역사와 과학과 문학과 SF로 그득한 나만의 서재를 구축하고 그 책들을 방문자들과 공유하며 판매하는 서점이 나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대략적으로나마 계산해본 후 깔끔하게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렇게 내가 한때나마 꿈꾸었던 서점이 놀랍게도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물론 내가 차린 곳이 아니다 보니 내 취향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한때 꾸었다가 접어버린 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또 나와 아무 관련도 없는 누군가가 나의 옛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모습이 내게는 벅차도록 기쁘게 다가왔다. 그저 이곳이 오래도록 유지되기만을 바라면서 나는 아내가 고른 책 세 권과 딸아이가 고른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계산한 후 밖으로 나왔다. 이곳을 둘러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존재 가치는 차고도 넘쳤기에 굳이 사족을 더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