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짜리 제주도 보름 여행 - 열두째 날
오늘은 아침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날이었다. 숙소를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제주도 보름 살기를 계획하면서부터 중간에 숙소를 한 번 바꿀 예정이었다. 예전에 서귀포 위미 쪽에서 한 번 묵었던 곳이 있는데, 주인 부부가 인정이 있거니와 집에서 기르는 커다란 개 두 마리도 귀여워서 정감이 가는 곳이다. 그래서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3박 4일 동안은 이곳에서 머무르는 것으로 미리 정해 두었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섭섭한 마음이 반, 번거로운 마음이 반이다. 열흘이 넘도록 살다 보니 벌써 지금의 숙소에 익숙해진 까닭일까. 더군다나 지금의 숙소는 방 셋에 화장실 둘과 부엌까지 딸린 큰 집인데 옮겨가는 곳은 작은 방 하나로 끝이다. 삼 인 가족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짐 꾸러미를 일일이 차에 싣는 것 또한 여간 큰일이 아니다. 물론 나의 짐 싸는 솜씨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아내가 그 번거로운 일들을 죄다 도맡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힘은 써야 하니까.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아내는 새로운 숙소로 옮겨가는 게 기쁜 모양이다. 지금 숙소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내 짐작과는 꽤나 결이 다르다. 아내는 지금 숙소에 있으면서 그다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한다. 왜냐면 마치 우리 집에 있는 것처럼, 방이 더러우면 청소를 하고 싶고 빨랫감이 쌓이면 세탁기를 돌리고 싶고 물건이 어질러져 있으면 정리정돈을 하고 싶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당최 여행을 온 것 같지가 않다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니 아내는 그랬다. 숙소에 온 지 이틀 만에 화장실 청소를 했고 다음날 아침에는 온 집안에 청소기를 돌렸다. 식탁 위에 물건이 놓여 있으면 언제나 다른 곳으로 치웠고, 마른빨래가 건조대에 널려 있으면 개어서 집어넣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집은 우리 집이 아니니 대충 하라고 투덜거림을 섞어 잔소리했다. 하지만 아내의 타고난 성격은 나처럼 무던하거나 혹은 무신경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아내는 숙소를 옮기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단다. 자신이 치워야 하는 집이 아니라, 남이 치워놓는 집으로 가고 싶어서.
과거 자취할 때 작은 방 안에다 내 한 몸 눕힐 공간을 빼놓고는 죄다 물건을 잔뜩 쌓아두었던 나로서는 아마도 평생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부부로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일들의 반복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이지만 동시에 인정해야만 할 일이 무수히 많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건 아니라는 걸, 비록 이론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깨달은 건 결혼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드디어 제주시 구좌읍의 숙소를 나와 출발했다. 서귀포시 남원읍까지는 한 시간 반 거리였다. 하지만 그전에 일단 열흘간의 쓰레기를 내다 버려야 했다. 제주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종량제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하필 우리 숙소 근처에는 없어서, 나는 자동차로 십 분이나 떨어진 곳까지 가서 쓰레기를 버리고 오곤 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보니 이런저런 쓰레기들을 모두 합쳐서 네 봉지나 되는 게 아닌가. 일단 아내와 아이를 숙소 근처의 브런치 카페에 밀어 넣고 음식을 주문한 뒤, 나는 다시 차를 몰고 가서 쓰레기를 버렸다. 재활용품을 착실하게 분류하여 하나하나 집어넣은 후 돌아오자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다.
브런치 카페의 이름은 독창성이 부족했다. 비자림 근처의 식당이 다들 그렇듯 이곳 역시 간판에다 비자라는 두 글자를 큼지막하게 박아 넣어 두었다. 하지만 독창성의 부족과는 관계없이 샌드위치는 훌륭했다. 대한민국에서 메뉴판 사진에 찍힌 그대로의 음식이 나오는 곳은 실로 찾아보기 어려운 법인데, 그 드문 식당이 바로 여기 있었을 줄이야. 아침을 굶고 나와 느지막이 먹는 식사인데도 불구하고 미처 다 먹지 못할 정도로 양도 많았다.
그리고 식당을 나와 도로로 접어드는데 아뿔싸! 가게 맞은편에 쓰레기 버리는 곳이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숙소에서 걸어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는데도 그간 다른 길로만 다니느라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던 이런 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에도 왕복 이십 분을 허비하여 쓰레기를 버리고 온 나로서는 한숨이 나올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는데.
중간에 비는 시간을 때울 겸, 가는 도중에 녹차밭에 들렀다. 대규모로 녹차를 재배하면서 겸사겸사 체험장 비슷하게 운영하는 곳이다. 입구 부근에는 젖소 목장과 흑돼지 축사를 견학 가능하다고 안내가 붙어 있는데, 하필 날씨가 부쩍 더워진 탓인지 소들은 집에 틀어박혀 더위를 피하는 중이고 돼지들은 손바닥만 한 그늘에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다. 동물들을 볼 거라는 기대에 들떠 있다가 급 실망한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 한 그릇을 안겨 주어야 했다. 심지어 뙤약볕 아래 녹차밭 트래킹에 참석한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던 탓에 아이의 불평불만은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 올라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코스 막바지에 염소들이 있어서 나는 안도할 수 있었다. 딸아이가 워낙 동물 먹이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신이 난 아이는 옆에 마련되어 있는 나뭇잎과 곡식 따위를 양손에 잔뜩 들고 염소들에게 먹여주는 데 열심이었다. 그렇게 거의 삼십여 분을 보내며 검은 염소 네 마리와 흰 염소 두 마리의 배를 가득 채운 후에야 딸아이는 아쉬운 듯 발걸음을 돌렸다. 그동안 염소우리의 냄새를 피해 저만치 도망가 있던 아내는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며 다시 우리와 합류했다.
다시 차에 타고 한동안 산간도로를 달려 마침내 새로운 숙소에 도착했다. 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개가 낯선 사람이 왔다고 짖어대며 야단이다. 주인아주머니가 가져다준 귤 음료로 목을 축인 후, 아이와 함께 개 등을 잠시 쓰다듬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후 힘을 내어서 차에 실린 짐들을 낑낑대며 다시 새로운 방에 옮겨다 놓았다. 그렇게 짐을 들고 차와 방 사이를 네 번쯤 왕복하고 나자 내 보잘것없는 체력은 완벽하게 소진되어 버리고 말았다. 역시 숙소를 옮기는 건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