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당연한 말이지만 조조의 휘하에는 우수한 장수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다섯 사람을 이른바 오대양장(五子良將)으로 꼽습니다. 이들은 수십 년간 조조를 위해 복무하며 무수한 전공을 세워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대체로 원소 토벌을 전후하여 장군(將軍), 즉 지휘관급이 되었지요. 또한 조조가 신뢰한 친족 장수로는 하후돈과 하후연, 조인과 조홍 네 사람이 꼽힙니다. 이중 하후돈은 승진이 상당히 빨랐지만 다른 세 사람은 장악우장서 다섯 사람보다 한 수 처지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승상이 된 208년 이후로 상황은 확연히 달라집니다. 우선 하후연과 조인 두 사람이 급속도로 승진하게 됩니다. 일단 그 두 사람의 전적을 한 번 살펴볼까요.
우선 하후연. 209년에 행령군(行領軍)이 되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해 여강의 뇌서를 공격합니다. 210년, 행(行) 정서호군(征西護軍)이 되어 서황을 거느리고 태원의 도적떼를 공격합니다. 212년, 조조가 관중을 토벌한 후 돌아가자 행(行) 호군장군(護軍將軍)이 되어 장안에 주둔합니다. 214년, 장합을 거느리고 마초를 격파합니다. 한수를 때려잡고, 송건을 목 베고, 다시 장합을 보내 강족을 토벌합니다. 216년, 한중을 공격할 때 행(行) 도호장군(都護將軍)이 되어 장합과 서황을 거느리고 파군을 공격합니다. 이후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서쪽 일대 방어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다음은 조인. 208년에 조조가 적벽에서 패한 후 조인을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삼아 강릉에 남깁니다. 212년에 마초를 토벌할 때 행(行) 안서장군(安西將軍)이 되어 장수들을 지휘하고, 소백과 전은이 모반하자 행(行)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7군을 지휘했으며, 관우를 견제하기 위해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어 번에 주둔했습니다. 이후 219년에 후음이 난을 일으켰을 때 진압하고 정남장군(征南將軍)에 올라 남쪽 일대 방어의 총책임자가 됩니다.
자. 보시면 유독 행(行)이라는 글자가 많이 보이지요? 이건 특정한 벼슬이 공석으로 있어 그 자리를 대행한다는 뜻입니다. 후대에는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해서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지위를 받으면 수(守)를 붙이고 품계보다 낮은 지위를 받으면 행(行)을 붙이는 식으로 제도가 정비됩니다만, 삼국시대에는 그렇게 꼼꼼하게 운영되지는 않았고 그저 대행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다만 하급자가 상급직을 맡은 경우가 많았던 걸로 보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임명하기는 경력이나 관직 등이 좀 부족하다 보니 일단 대행을 먼저 시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후연과 조인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여러 요직들을 두루 맡았습니다. 우선 하후연을 보실까요? 영군(領軍)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직책은 대체로 중앙군을 통솔하는 직책으로 보시면 됩니다. 다른 장수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지요. 그 바람에 서황이나 장합처럼 본래 하후연보다 장군을 빨리 달았던 숙장들이 오히려 하후연의 휘하에 들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하후연의 군공이 부쩍 늘어나게 되지요. 이건 조조가 적극적으로 하후연을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208년에 행 정남장군이 된 이후로 무려 네 차례나 요직의 대행을 맡으며 장수들을 지휘하는 입장이 되고, 많은 공적을 쌓으면서 지위도 점차 높아집니다.
그 결과 하후연과 조인은 불과 십여 년 사이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승진하여 군부의 최고위급 직위에 올라 각기 서쪽과 남쪽을 방어하는 군단장급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정서장군 하후연은 서쪽. 정남장군 조인은 남쪽. 여기에 정동장군 장료까지 합쳐 세 사람이 위나라의 국경을 관할하는 체제가 마침내 완성된 거죠.
앞서 말했다시피 장군(將軍)은 군사를 지휘하는 직위입니다. 본래 한나라의 제도 하에서는 장군직 대부분이 비상설이었습니다. 대장군, 그 아래 표기장군+거기장군+위장군, 또 그 아래 전좌우후(前左右後) 사방장군 여덟 명만이 상임직이고 그 외에 모든 장군들은 통칭 잡호장군(雜號將軍)이라 하여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임명하고 필요가 없어지면 폐지하는 식으로 운용했습니다. 정남장군이나 정서장군 같은 사정장군(四征將軍)도 마찬가지였어요. 말 그대로 동쪽을(東) 정벌할(征) 일이 있으면 정동장군직을 만들어 누군가를 임명했다가, 그 정벌이 끝나면 정동장군직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유비와 조조와 손권 세 사람이 천하를 나누어 가진 바람에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된 시대적 특성상, 위나라에서 이 사정장군은 상설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각 방면의 총지휘관 역할을 하게 되니 오히려 기존의 전좌우후 사방장군보다도 훨씬 중요해지고, 지휘하는 병사 수도 늘어나며, 실권도 강해지지요.
왜 이렇게 했을까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조가 관할해야 할 영토는 너무나 넓었고, 또 조조가 제아무리 훌륭한 지휘관이라 해도 동시에 여러 전장에 출몰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각 방면별 지휘관을 임명하는 건 필연적인 선택이었지요. 그리고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당연히 그 지휘관의 병력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하려니 조조는 무척이나 걱정이 되었을 겁니다. 사정장군의 역할과 군사력이 늘어났다는 건 곧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 순간 조조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조는 친족을 발탁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한 핏줄이라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친족 우대 정책은 조조의 말년으로 가면서 더욱더 가속화됩니다. 또 다른 친족인 조진과 조휴가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조조의 조카뻘로, 조인이나 하후연보다는 한 세대 뒤의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조씨 가문의 신진기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들은 218년에 일어난 한중공방전을 전후하여 역시 군사 관련 요직을 맡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조진은 218년 한중공방전 때 이미 편장군에 올라 있었다가 하변에서 공을 세워 중견장군(中堅將軍)으로 승진하고 중령군(中領軍)이 됩니다. 이후 219년에 정촉호군(征蜀護軍)이 되어 서황 등을 지휘해 유비의 장수 고상을 격파합니다. 조휴는 218년 한중공방전 때 기도위(騎都尉)로 조홍의 참모 역할을 하며 공을 세웠고 이후 중령군(中領軍)으로 승진합니다. 중령군을 설명하려면 너무 복잡하니 그냥 영군이나 호군처럼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은 직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결론적으로 이 두 사람은 이때부터 죽죽 승진하여 마침내 조조의 사후 위나라를 떠받치는 군부(軍部)의 양대 산맥이 됩니다.
여기에다 조조는 결국 친아들에게도 군사들을 쥐어줍니다. 218년, 조창은 북중랑장(北中郞將) 행 효기장군(驍騎將軍)이 되어 북방의 이민족을 토벌했고 돌아와서는 행 월기장군(越騎將軍)이 되어 장안에 주둔합니다. 조식은 219년에 남중랑장(南中郞將) 행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되어 조인을 구원....... 할 뻔했으나 술에 취한 바람에 취소됩니다. 어쨌든 조조는 친자식에게 군권(軍權)을 쥐어준 거죠. 더군다나 이건 조비가 공식적으로 태자이자 후계자가 된 이후의 일입니다. 공인된 후계자가 아닌 자식들에게 권력을 주면 자신의 사후에 후환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이렇게 행동한 건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조조는 불과 십여 년 사이에 군부의 주요 직책을 죄다 친족들로 채워 버립니다. 여기다 복파장군(伏波將軍) 하후돈과 도호장군(都護將軍) 조홍까지 있으니만큼 나머지는 말할 나위도 없었지요. 예외라면 정동장군 장료 정도였는데, 그는 본래 여포 휘하에 있다 항복해 온 항장인 데다 출신지역도 병주 안문군이라는 촌구석이라 가문의 힘을 기를 만한 처지가 못 되었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친족 위주로 군부를 운영한다 해도 적에게 이기지 못한다면 안 된다는 걸요. 그래서 조조는 훌륭한 장수들을 친족들의 부장(副將) 격으로 붙여 줍니다. 장합과 서황이 하후연의 부장 노릇을 한 건 앞서 언급한 바 있고, 조인은 휘하에 만총이 있었습니다. 문과 무 양쪽에서 엄청난 공적을 쌓은 인재죠. 이러한 조치야말로 바로 제가 말한 낙하산 발탁과 능력위주 인사의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결국 조조는 220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위나라의 군사력은 고스란히 조씨 일가의 손아귀에 들어온 이후였습니다. 비록 정서장군 하후연이 죽었지만 조진이 정촉호군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후 진서장군(鎭西將軍)이 되었습니다. 정남장군 조인이 승진하자 그 직책은 하후연의 조카 하후상에게 돌아갑니다. 정동장군 장료만은 유일하게 친족이 아니었습니다만, 그가 죽은 후 후임은 바로 조휴였습니다. 하후연-조인-장료가 조진-하후상-조휴로 대체되며 친족 중심의 군부 운영이 더욱 강화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