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어린 조방이 즉위하자 위나라는 두 명의 탁고대신에게 맡겨졌습니다. 조상은 대장군(大將軍) 시중(侍中)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녹상서사(錄尚書事)였고 사마의는 태위(太衛) 시중(侍中) 도독중외제군(都督中外諸軍) 녹상서사(錄尚書事)였지요. 그냥 ‘이 두 사람이 짱임’이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다 조비가 죽기 직전 황후로 삼은 곽씨 일가가 더해졌지요. 선덕장군(宣德將軍) 곽립, 전호장군(鎮護將軍)인 곽덕과 곽건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조상과 사마의에 비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조상과 사마의는 권한을 나누어 가지면서 대부분의 직함이 겹친 상황이었습니다. 권력의 균형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상이 꾀를 하나 부립니다. 사마의를 승진시켜야 한다고 어린 황제 조방에게 상주한 겁니다.
사서는 이걸 조상이 사마의를 위해주는 척하면서 실속을 차리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사마의를 자기보다 더 높이 올리면 실무적인 보고가 자신을 거친 이후 사마의에게 올라가게 되니, 이로써 은근히 정사를 좌지우지하기 위함이라는 거죠. 이 일은 조상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사마의는 대장군보다 높은 지위인 태부(太傅)가 됩니다. 승상이 없는 위나라 제도 하에서 이보다 더 높은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후 조상은 여러 동생들과, 조예 시절에 중히 쓰이지 못한 여러 사람들을 요직에 올립니다. 자신의 세력을 차곡차곡 쌓아 나간 거죠. 이를 보면 조상이 처음부터 사마의를 이용해 자신이 위나라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의도임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럼 사마의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열심히 나라를 지켰습니다. 정말로요.
241년. 오나라가 형주 일대를 크게 공격해 오자 사마의는 출격하여 적을 박살 냅니다.
243년. 사마의는 오나라의 제갈각을 다시 한번 박살 냅니다.
자. 이쯤 되니 사마의의 명성은 이미 천하를 뒤흔들 지경이었습니다. 나이로든 실적으로든 벼슬로든 간에 위나라를 통틀어 사마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상이 아무리 날고뛰어도 사마의에게 미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하후상의 아들이며 조상의 이종사촌뻘인 하후현이 사마의에게 도전합니다. 그는 사마의에게 여러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하죠. 이중 가장 핵심적인 건 바로 구품관인법을 갈아엎자는 겁니다. 중정의 권한이 너무 강하니까 제한하고, 또 추천을 마음대로 할 수 없도록 연대책임도 도입하자는 것이었지요. 이 개혁 방안에 대한 사마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거 참 좋은 의견이니 우리가 늙어 죽은 다음에나 검토해 봅시다.”
조비가 구품관인법을 도입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황제가 중정들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그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방 호족들을 관리할 수 있죠. 그런데 조예를 거쳐 조방에 이르면서, 황제가 중정들을 제어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애초에 여덟 살짜리 꼬마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구품관인법은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 귀족만을 위한 제도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강성한 중앙 귀족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 가장 적합한 제도가 된 지 오래였지요.
그런 현실 하에서 사마씨의 세력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이미 위나라에서 가장 강대한 귀족 가문이었고, 여러 가문들이 그들과 직간접적으로 결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후현의 제안, 구품관인법을 수정하고 보완하자는 제안은 사마씨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힘을 줄이겠다는 의미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조상 일파의 사마의에 대한 공격이었지요. 그러나 이 공격은 너무나도 손쉽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조상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마의의 세력을 꺾지 못한다면 반대로 자신의 세력을 더 키우면 되는 거였죠. 조상은 하후현을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유를 정남장군(征南將軍), 왕릉을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임명합니다. 마치 조비가 그랬던 것처럼 밖에서 군사를 이끄는 권한을 죄다 친족과 측근에게 몰아준 것이었죠. 그리고 당당하게 제안합니다. “촉나라를 공격합시다.”
사마의는 몇 번이나 오나라를 격파하며 전공을 쌓았습니다. 조상이 그와 대등한 위치에 서고자 한다면 결국 그에 맞먹는 전공을 세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죠. 사마의는 그 정벌을 반대했지만 조상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244년. 조상은 하후현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촉을 공격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촉장 왕평과 비의에게 완벽하게 박살 났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낙곡 전투입니다.
자. 이제 세상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조상은 얼간이라는 사실을, 또한 위나라의 진짜 실세는 사마의라는 것을 말입니다. 무능하기 그지없는데도 단지 친족이라는 이유로 임용된 낙하산 조상. 수십 년 전 조조가 내세운 유재시거(唯才是擧)가 이제는 오히려 조씨 황실의 목을 조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요.
조상은 그런 평가를 뒤집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만 그의 재능과 깜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후 수년간 조상은 삽질에 삽질만을 거듭하게 됩니다.
5년 후인 239년 정월, 사마의는 이른바 고평릉 사변을 일으킵니다. 그리하여 조상 일파를 죄다 잡아들여 죽이고 삼족을 멸한 후 위나라를 장악하지요. 기대하셨던 분들께는 죄송합니다만, 그 자세한 저간의 상황을 묘사하는 건 이 글의 취지와는 맞지 않으니 관두겠습니다. 언젠가 따로 서술할 기회가 있겠죠.
핵심은 고평릉 사변으로 인해 조씨의 친족들이 완벽하게 쓸려나갔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황족 보위 세력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조조와 조비, 조예 삼대에 걸쳐 구축한 황권 수호 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마의는 정권을 장악한 후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설치합니다. 이게 뭐냐면, 원래 구품관인법은 군(郡)마다 중정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정들 위에 주(州)를 관할하는 주대중정을 새로 만든 거죠. 그리고 그 역할은 조정의 대신들에게 부여되었습니다. 즉 사마씨와 사마씨를 따르는 극소수 귀족 가문에게만 허락된 권한이었습니다.
이 주대중정의 신설로 인해 구품관인법은 당초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귀족만을 위한, 기득권 세력의 강화를 위한 인사 제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제 귀족 중에서도 일부는 이른바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철저하게 계급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황실마저 뛰어넘는 권위를 가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문벌귀족의 필두였던 사마씨 가문이 황위를 찬탈하고 위나라를 멸망시킨 건 어쩌면 그저 당연한 수순일 따름이었습니다.
265년. 사마의의 손자이자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진나라를 건국합니다. 하지만 나라가 뒤집혔는데도 사회 지배층인 문벌귀족들의 권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미 나라의 이름 따위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황제들이 오히려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지경이었지요.
이 모든 걸 단지 조상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가혹한 일입니다. 오히려 조씨 일가가 만들어 온 체계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살펴보는 게 더 합당한 행동일 겁니다.
조조의 유재시거, 능력 중심의 인재 채용은 군주 한 사람의 안목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기에 본질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꺼내 든 방책은 친족을 중심으로 군부를 장악함으로써 황실을 보위하는 것이었습니다. 난세에는 무력(武力)을 가지고 있으면 뭐든지 해결할 수 있다는 간단명료한 논리였죠. 그리고 조조는 친족 중에서도 특히 능력 있는 자들을 알아보는 뛰어난 안목까지 있었습니다. 이들이 조씨 일가를 떠받치는 기둥이 됩니다.
하지만 국가의 체계가 갖추어질수록 단순히 무력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찬탈자 조비는 아버지의 방식이었던 친족 중심의 군부 장악을 유지하면서도,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구품관인법을 도입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중앙으로 끌어들이고 회유합니다. 이 두 가지 체제를 통해 조비는 적어도 당대에는 황권을 위협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비가 너무 빨리 죽고 정통성이 부족한 조예가 황위를 계승하자 그런 시스템에 균열이 생깁니다. 조예는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좋든 싫든 간에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어요. 조진과 조휴의 때 이른 죽음은 그런 현실 인식을 부채질했습니다. 친족을 통한 군부 장악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조예는 친족이 아닌 사마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적어도 조예의 판단으로는, 신뢰할 수 있는 충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조예는 귀족에게 기울어진 저울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황족과 친족들을 중용합니다. 친족이라는 무척이나 제한된 인재풀에서 억지로 사람을 끌어다 썼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건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젊은 친족들에게 경험과 실적이 쌓이면 조진과 조휴를 대신할 수 있을 터였죠. 그러면 할아버지 조조와 아버지 조비가 만들어놓은 체제를 복구할 수 있었습니다. 조예에게 필요한 건 오직 시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조예는 아버지보다 더 일찍 죽어버립니다. 그가 남긴 후계자는 출신성분조차 알 수 없는 여덟 살짜리 아이 조방이었습니다. 조비의 충신이자 조예의 충신이었던 사마의는 그 정체 모를 꼬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속내는 어떠했을까요.
조상. 환범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조진은 훌륭한 인물이었으나 이런 소 새끼 같은 자식들을 낳았구나!’ 하고 탄식하였던 그 조상은 사마의를 어설프게 견제합니다. 너무 어설펐던 나머지 사마의에게 역습의 기회를 주고 결국 자신의 가문 전체가 멸족되었죠. 이로서 조씨 황실은 모든 힘을 잃습니다. 저 이상 되돌릴 저울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요. 조상이 죽는 순간 천하는 이미 사마씨의 손에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것이 조씨 위나라의 인사 제도와, 그 붕괴로 인해 황실 자체마저 무너져 내리고 만 전말입니다. 제도를 만든 건 사람이지만 결국 제도를 무너뜨린 것 또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위나라가 운이 나빴던 건 사실입니다. 조비와 조예 중 한 사람이라도 충분히 오래 살았더라면 위나라가 그토록 맥없이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여 대대손손 황위를 물려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가정일 뿐이지요. 그보다 황제가 오래 살아야만 유지될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애초에 그 시스템 자체가 글러먹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위나라의 체제가 붕괴한 후 남은 것은 오호십육국으로 대표되는 수백 년간의 끔찍한 혼란기였습니다. 그 기나긴 혼란기가 끝나고 마침내 수나라가 건국된 후,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사 제도가 도입됩니다. 바로 과거제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