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딘디버그 Apr 15. 2016

바다에서 온 편지

진실의 표류, 세월호 참사 그 이후

  제목 사진 출처 : Copyright ⓒ  세월호 단원고유가족대책위 시민기록위원회 사진기록단


세월호 참사 2주기가 어느덧 가까워져 오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아직도 묘연한 상태다. 이번 글은 그동안 진실이 어떻게 표류해왔는지를 희생자의 시선으로 재구성해보았다. (본 글은 한겨레21과 뉴스타파를 비롯한 신문과 잡지 등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번에 입학한 친구들아 축하해. 이제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대학에 입학했잖아. 아마 나도 그날이 아니었다면 너희와 마찬가지로 그 부푼 기대를 가지고 함께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겠지? 참, 내가 누구인지 이야기도 안 했네. 나는 너희의 가슴에 있는 노란 리본이라고 말하면 알까? 오늘은 잠시만 시간을 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봤던 것들을 얘기해주고 싶어.       

   

 2014년 4월 16일. 폭풍을 동반한 번개 

수학여행 가는 날     


숨 막히던 교실을 떠나 제주도로 여행가는 날이었어. 3박 4일 제주도에서 보낼 날들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지. 어느 순간 나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닷물에 눈앞이 흐려졌어.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땐 엄마와 아빠, 그리고 모르는 어른들이 울고 계셨어. “어른들이 미안해”. 어른들은 왜 ‘미안해’라고 했을까?          


2014년 6월 30일. 비 

소란스러웠던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기관보고     


많은 어른들이 보였어. 그리고 한쪽에선 엄마와 아빠도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는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기관보고’라는 글자가 쓰인 현수막이 있었어. 우리가 탔던 배가 왜 기울었는지 궁금했는데 다행이다. 근데 이상하게 배가 침몰한 이유에 대해서 나오지는 않았더라. 한쪽에선 그날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뭐 했는지 질문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더 이상 국정조사를 하지 않겠다”고 언성을 높였어. 분명 진상규명을 한다고 했는데 왜 이상한 이야기만 할까? 엄마와 아빠는 “야당이 잘못했다는 것이 진도에 있는 가족들이 나자빠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가. 500명 부모들이 그냥 싹 다 죽어 없어질까?”라며 울면서 주저앉으셨어.     


그날, 재난 컨트롤 타워로서의 대응 미숙과 관련된 대질 심문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청와대는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 보고를 하는 기관이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말했다.   


       

2014년 7월 2일 ~ 15일. 흐림 후 비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그리고 서명운동     


엄마와 아빠는 경기도청 프레스센터에서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들을 잊지 말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했어. 나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로 불리고 있었어. 같은 날 친구의 아버지와 누나는 진상규명과 친구들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며 십자가를 들고 750km 걷기 시작했어. 또 12일 다른 부모님들은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며 밥을 먹지 않기 시작하셨어. 15일에는 친구들이 국회의사당에 왔어. 친구들이 피켓을 들고 “저희 친구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저희들은 법을 모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친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울고 있었어. 미안하다고.  

    

7월 20일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으로 만들어 보상해 달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안전사고로 죽은 것을 국가유공자들보다 몇 배로 보상해달라는 것이 세월호 특별법”이라는 내용을 담은 메시지가 카카오톡을 통해 퍼졌고, 이것은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였던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이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Copyright ⓒ 문화체육관광부 코리아넷 진한


2014년 8월 7일 ~ 22일. 흐림 

여야 세월호 특별법 잠정 합의. 그러나 찜찜함     


배가 침몰한 이유를 밝힐 수 있게 한다고 국회의원들이 합의했대. 그런데 엄마와 아빠는 이번 합의가 맘에 들지 않는가 봐. “우리가 원한 것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고 소리치셨어. 그런데 갑자기 빨간 옷을 입은 국회의원이 “특별법은 사법체계를 뒤흔든다.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며 언성을 높였어. 진실을 밝히는 데 필요한 조치가 대체 어디가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우리가 어떤 이유로 배가 침몰하게 된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인데. 어른들은 그게 아닌가 봐. 14일 교황님이 오셨대. 그래서 대통령님이 맞이하러 나갔다고 하더라고. 내 친구 아빠는 대통령님과 면담하고 싶다고 밥도 안 먹고 있다는데. 22일 내 친구의 동생은 “대통령님 우리 가족을 죽이지 말아주세요”라고 울면서 말했어. 눈물로 참사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했고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통령님 대신, 아무 상관 없던 교황님만이 친구 부모님들을 만나주셨어. 결국 대통령님은 내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주지 않았어.      


11월 7일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유가족이 원했던 수사권과 기소권은 형사 처벌 대상자로만 국한되었다. 유가족이 원한 수사권은 특검으로 대체되었으나, 특검 기간이 길어야 석 달로 규정되어 진상을 규명하고 해당 직무자를 처벌하기에는 너무 짧았으며, 특검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세월호 특조위’의 독립성은 유명무실해졌고, 진상규명의 길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2015년 3월 27일 ~ 4월 2일. 번개를 동반한 비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입법 예고. 그리고 파열음     


드디어 배가 침몰한 이유에 대해 알 수 있게 되는 걸까? 나라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시행될 수 있게 한대. 그걸 사람들은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이라고 불렀어. 근데 엄마와 아빠는 “억울하게 숨진 내 새끼가 왜 그렇게 죽어갔는지 밝혀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라고 말했어. 알고 보니 나라에서 엄마와 아빠가 요구한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았었어. 진상규명은 엄마와 아빠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나라에서 전적으로 해야만 한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실을 알고 싶다고 말해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이제는 조사도 하지 말래. 나는 내가 탔던 배가 침몰한 이유를 알 수는 있기는 한 걸까? 4월 2일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신들을 세월호 특조위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시행령 철회를 결의했어. 같은 날 친구의 부모님들이 광화문 앞에 모였어. “그냥 자식 잃은 엄마로 봐주세요. 왜 이렇게 돈으로 포장해요. 그게 더 서럽습니다”라고 절규하시며 삭발을 하셨어. 엄마와 아빠 그리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진실을 알고 싶으신 것뿐이었는데, 왜 자꾸 울게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3월 27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안’ 입법예고를 앞둔 해양수산부는 특조위와 유가족들이 사전 의견 반영을 요구하는 공문을 수차례 보냈음에도 경청하지 않았다. 특조위 주요 업무를 정부에서 파견한 공무원이 쥐도록 했으며, 그뿐 아니라 업무를 직접 지휘하는 특조위 상임위원 5명 중 한 자리는 새누리당에서 추천한 조대환 부위원장이었다. 또한, 특조위에게 정부조사결과 범위 내에서만 조사할 것, 특조위 인원을 120명에서 90명으로 감축할 것을 지시하는 등 사실상 특조위 폐기안이나 다름없었다.      

    

Copyright ⓒ  뉴스타파


2015년 4월 29일 ~ 8월 4일. 번개를 동반한 비

달라진 것 없는 특별법 시행 수정령 발표. 그리고 또다시 파열음   

  

이제 진짜 진실을 알 수 있는 걸까? 엄마와 아빠가 철회하라고 요구했던 특별법 시행령이 수정 되었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세월호 특조위 사람들이 그걸 듣고 오셨는데,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야. 하지만 특조위 사람들이 이제는 어쩔 수 없대. 더 늦어지면 안 된다고 했어. 엄마와 아빠도 점점 지쳐 보였어.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찾기 위해 특조위 사람들과 더 바쁘게 움직이셨어. 그러던 7월 13일 나라에서 특조위와 같이 일하라고 보내준 국회의원이 세월호에는 찾아낼 진실이 없다고 했어. 찾아낼 진실이 없다면, 대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은 1년이 넘었는데도 왜 그날 죽은 이유에 대해 알 수 없는 걸까. 정말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죽게 된 걸까? 나라에서 내가 죽은 이유가 없다고 하니까 정말 혼란스럽고 화가 났어. 8월 4일 엄마와 아빠가 힘이 빠진 상태로 오셨어. 특조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어보니, 나라에서 진상규명에 쓸 예산이 원래보다 많이 줄였다고 하더라고. 또 엄마와 아빠 그리고 특조위 사람들은 배를 인양하는 걸 볼 수 없을 것 같다고도 했어.     


4월 29일 발표된 수정령은 애초 입법예고안에 들어 있던 ‘기획조정실장’을 ‘행정지원실장’으로 ‘종합·기획’이 ‘협의·조정’으로 바뀐 단순 말장난이었다. 또한 진상규명의 범위를 ‘정부 조사결과의 조사 및 분석’만으로 규정했던 입법예고안에서, 수정안은 ‘정부 조사결과의 조사와 원인 규명에 관한 조사’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 특조위는 3월부터 해양수산부, 검찰, 법원 등에 공식 자료를 요청하였지만 대부분 외면받아왔다. 즉, 본질적인 부분은 전혀 수정하지 않은 것이다.

5월 18일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은 “현재 특조위는 활동을 못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게 맞으며 이를 상당히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즉, 세월호 특조위가 1월 1일부터 활동을 해야 했으나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실제로 특조위가 정부로부터 임명장을 받은 것은 3월 9일이었으며, 예산도 받지 않아 자비로 활동을 겨우 이어나가고 있었다.

7월 13일 조대환 부위원장은 “침몰과 구조의 전 과정은 전 국민에게 생중계됐다. 존재하지 않는데 별개의 진상이 존재하는 것처럼 떠벌리는 건 혹세무민이며, 이를 위해 국가의 예산을 조금이라도 쓴다면 세금도둑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 12월 14일 ~ 16일. 흐림

세월호 특조위 1차 청문회 개최. 그리고 기억상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 벽에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라는 현수막이 보였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장소가 너무 좁았어. 내 친구들은 300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결국, 이날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어. 사람들이 전부 다 기억이 나지 않는대. 난 아직도 그날의 일이 떠올라서 괴로운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대. 배가 침몰한 건 어른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었나 봐. 우리를 구하러 왔던 해양경찰 아저씨는 “애들이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런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했어. 선실 방송에 따라 안에 있었던 우리보고 철이 없다고 하고. 이게 누구를 위한 청문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 해양경찰청장이라는 사람도 잘못이 없다고 했어.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일어나더니 소리치셨어. “솔직히 너무하는 것 아니냐. 위증이다. 위증”하시며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시더니 배를 찌르셨어. 자세히 보니, 그날 내 친구들을 구해주신 잠수부 아저씨였어. 왜 아저씨가 아파야 하는지 모르겠어. 왜 자꾸 아픈 사람은 더 아프게 되는 걸까. 저 어른들에게는 우리가 아프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엄마와 아빠가 청문회 마지막 날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이 있지만 나는 가슴에 묻고 있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 있도록 힘 좀 써주세요”라고 특조위 사람들에게 울면서 말했어.       


12월 14~16일 서울 YMCA 4층 대강당에서 진행되었다. 당초 특조위와 유가족은 국회에서 하길 원했으나, 국회는 ‘국회가 주관하는 국제회의 등 공식행사, 교섭단체가 국회의 운영을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 등에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또한 특조위 중 여당 측 추천의원 5명은 불참했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에서는 '초기 구조·구난 및 정부대응의 적정성', '해양사고 대응 매뉴얼 등의 적정성', '참사현장에서의 피해자 지원조치 문제점'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졌으나,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모르쇠 일관과 서로의 엇갈린 진술, 특조위의 미숙한 진행 등으로 인해 진실규명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끝났다.   

Copyright ⓒ  문화체육관광부 코리아넷 진한

       

2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왜 바다 한가운데서 죽게 되었는지 아직 모르겠어. 사실 그 이유를 너희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거든. 비록 너희와 살아갈 순 없지만, 너희는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해서.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나와 내 친구들이 꿈꿔왔던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너희를 언제나 응원할게. 나는 앞으로도 엄마와 아빠랑 함께 다닐 거야. 나도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알고 싶거든.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 ‘나를 잊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럼 안녕.          



2016년 2월 16일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정부의 방해 행위 중단과 성역 없는 조사·수사 보장,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러나 여당은 반대의사를 명확하게 표시했다. 또한, “필요하다면 특검을 통해 모든 진상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던 대통령은 특검 요청에 어떠한 조치도 없이 현재까지 묵묵부답인 상태다.

3월 22일 특검을 촉구하는 특조위의 요청안에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은 “세월호 특검 요청안이 지금 국회법에서 시급을 요하는 안인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고, 요청안은 여당의 반대로 처리가 지연되고 있다. 


 한편 세월호 인양 작업은 5월에 실제 인양에 돌입해 6월 육상으로 올려 마무리한다는 기존 일정에서, 현재는 7월 말로 마무리 작업이 늦춰진 상태다. 아직도 우리는 즐거워야 할 수학여행이, 2년 전 그날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끔찍한 기억이 됐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작가의 이전글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