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잠을 잤다. 지난밤 확 불어난 살을 정리 해야겠다는 급한 다짐을 하고 유튜브 속 친구를 불러 같이 한 운동이 과했나 보다. 여기저기 몸이 쑤셔 뒤척였는데 눈을 뜨니 신랑 출근 이십 분 전이다.
점심 도시락 준비는 글렀고 급하게 아침 준비를 하려는데 팬케이크 만한 것이 없다. 어젯밤 긁어 둔 늙은 호박을 꺼내 소금 반 꼬집, 설탕 두 숟갈(두 줌에 밥 숟가락 한 개의 비율이 적당하다)을 넣고 열심히 치댄다. 냉장실에서 갓 꺼낸 것이라 손은 시리지만 번갯불에 콩도 볶아 먹어야 할 만큼 바삐 움직여야 하니 '앗 차가워'할 새도 없이 주물러 댄다.
가을이 되면 엄마는 늙은 호박을 방 앞에 주욱 쌓아 두셨다. 신문으로 똬리를 만들어 호박을 앉혀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두신다. 겨우내 사람의 숨결과 함께 해야 무르지 않고 잘 보관할 수 있다는 엄마만의 비법이다. 호박들도 외롭지 않아야 건강할 수 있나 보다. 엄마의 호박요리는 다양해 호박이 질릴 틈이 없었다. 김장을 담을 때 숭덩숭덩 늙은 호박을 썰어 넣은 호박김치는 겨우내 찌개를 끓일 때 사용한다. 늙은 호박의 달큰한 맛이 새콤한 김치 맛과 어우러지면 감칠맛이 폭발한다. 찬밥이 넉넉하게 남은 날이면 늙은 호박식혜를 만드셨다. 은근한 단맛과 시원함이 좋아 꿀떡꿀떡 마시다 보면 그날 밤은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다. 이는 강력한 호박의 이뇨작용 때문인데 잠은 못 자 눈은 퀭하지만 얼굴의 라인은 살아나서 좋아라 하며 한가득 퍼먹기 일쑤였다. 입맛이 없다고 투정을 할라치면 불린 쌀을 반은 곱게 또 반은 성글게 빻아 삶은 양대콩 듬뿍 넣어 끓인 호박죽이나 곱게 빻은 쌀가루로만 노랗게 끓여낸 호박범벅(방송이나 요리책에서 매끈하게 끓여낸 것을 호박죽이라고 부르더라)을 만들어 사이다처럼 톡 쏘는 동치미 한 사발과 함께 내어 주셨다. 집 나갔던 입맛도 돌아와 몇 그릇 씩 비워냈다. 식어서 꾸덕해진 호박죽에 콩가루를 뿌려 살살 굴려먹으면 그것 역시 별미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유용한 호박인데 자꾸 늙었다 부르는 건 실례인 듯하다. 철든 호박, 만능 호박쯤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늙은 호박요리를 잘하시는데 유독 실패했던 것이 늙은 호박전이었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가을이 오면 동네분들의 늙은 호박 인심이 좋았다. 텃밭에서 따왔다고 가게 앞에 한 덩이씩 놔두고 가시던 분도 있고 오후 서너 시쯤 큼지막하게 부친 호박전을 몇 장 씩 가게로 갖고 오셔서 출출함을 달래주던 나눔의 정도 있었다. 한데 다른 집 늙은 호박전은 달콤하고 부드럽게 호르륵 넘어가는데 엄마가 해 주시는 호박전은 뻣뻣하고 딱딱하고 밀가루 맛이 많이 났다. 두어 번쯤 만드시곤 몇 년을 안 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해 손님으로 오신 할머니였던가 난전에서 긁어놓은 호박을 파는 할머니 께던가 호박전 굽는 방법을 물어보셨다. 할머니가 술술 비법을 말하셨다.
"소금이랑 설탕을 팍팍 쳐서 주물럭주물럭하면 호박이 홍냐홍냐 해지면서 물이 주르륵 나온다. 그 물에 밀가루 넣고 반죽하면 부드럽지. 그냥 맨 거에 물 넣고 밀가루 넣으면 아무 맛도 없다."
그 날 이후로 엄마의 호박전은 언제나 백 점 만점에 백 점이다. 그리고 나도 늘 백점 짜리 호박전을 부친다.
다시 분주한 아침, 소금과 설탕을 넣고 주물러 삼투압과 압력으로 호박 속 물기를 빼내고 조직을 부드럽게 한 후 물 약간과 부침가루를 넣고 반죽을 한다. 되직하게 밀가루와 호박이 엉키도록 숟가락으로 떨어뜨리면 툭하고 떨어지는 정도면 된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한 숟가락씩 떼어내 지진다. 늙은 호박에 풍부한 노란색 카로틴 성분이 기름과 만났으니 흡수가 잘 될 듯하다. 맛과 건강 두 개 다 잡았다.
남편은 회사에 갖고 가 커피 한 잔과 가볍게 빈 속을 달랜다. 적당히 단 맛에 바삭하고 촉촉한 식감이 과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단다. 아이들은 펌프킨 팬케이크라고 맛있게 먹는다. 시럽을 뿌리지 않아도 달달한 맛이 좋다고 계속 만들어 달라고 성화다. 프라이팬으로 세 판 째 구웠다.
후디리의 늙은 호박전 요리법
1. 호박을 채 칼로 긁는다.
양이 많으면 소분해서 냉동실에 얼려둔다. 사용하기 전 전자레인지에 30초-1분 정도 돌려도 된다.
2. 긁어 둔 호박 속에 소금 약간(부침가루 사용 시 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조금), 설탕(주먹 두 개 붙인 정도에 밥숟가락 한 큰 술이 적당하다.)을 넣고 바락바락 주물러 준다.
생호박은 조직이 단단해 5분 이상 힘껏 주물러 줘야 한다. 호박이 색이 진해지고 축 늘어지면서 물이 흥건히 고인다. 냉동실에서 꺼낸 호박은 호박이 얼면서 세포벽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녹으면 물이 많이 나온다. 그냥 소금, 설탕 간을 해도 부드러운 호박전이 된다.
3. 호박에서 나온 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물을 더 넣고 부침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든다. 밀가루와 호박이 엉킬정도로 되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호박이 많아야 맛있다.
4. 숟가락으로 뚝뚝 떼어내서 지져낸다.
5. 간장 2:식초 1. 고춧가루 혹은 청양고추 혹은 페페론치노 가루 등을 기호에 따라 첨가해 초간장을 준비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