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지짐이, 그리고 어머니

by 김쫑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가 아직 안 가셨는지 저녁 시간인데도 광장시장 부침개 골목은 썰렁하다. 오늘은 왠지 골목 분위기도 그렇고 그다지 맛있을 것 같지도 않아 발길을 돌린다. 그때 어머니도 그랬다. 내가 맛있는 것을 드려도 어머니는 어떤 맛도 느끼지 못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3주째 병상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녹두지짐이가 먹고 싶다던 그날 나는 차를 몰고 광장시장으로 갔다. 어머니는 내가 사 온 녹두지짐이를 한 점 베어 물더니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며 이내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먹을 것이 넉넉지 않았던 어린 시절, 명절은 그나마 배불리 먹는 날이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틈틈이 읍내에 나가 장 봐온 것을 부엌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그 안에는 포대자루에 담긴 녹두도 있었다. 우리 집 명절은 전날 밤 녹두를 물에 담그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잠들기 전 빨간 고무대야에 물을 채우고 녹두를 담갔다. 살아생전에 어머니는 명절 전날 밤의 이 의식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다. 녹두는 충분히 불려야 껍질이 잘 벗겨지고, 잘 갈린다고 했다.

녹두지짐이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녹두지짐이가 아침 명절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불린 녹두를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겨내고 맷돌로 가는 일은 나와 형의 몫이었다. 밤새 불린 녹두는 저절로 껍질이 벗겨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두 손으로 녹두를 건져 손바닥으로 비비면서 껍질을 벗겨야 했다. 구부정한 채로 비비다 보면 허리가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급하다고 많이 집어서 세게 비비면 녹두가 으깨지기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비벼야 했다. 껍질을 다 벗긴 녹두를 내가 마지막으로 헹구는 사이 형은 광에서 맷돌을 꺼내와 위아래를 맞추고 손잡이를 잡고 돌리며 테스트를 했다. 명절날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맷돌도 광에서 나와 햇빛을 보는 날이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간 녹두에 섞을 재료를 준비했다. 장독에서 잘 익은 배추김치를 꺼내 속을 털어내고 잘게 썰고, 끓는 물에 고사리를 데치고. 숙주는 데치지 않았는데 그래야 지짐이가 더 바삭하다고 다. 어머니는 녹두지짐이에 유독 돼지비계를 많이 넣었다. 그것도 큼직하게. 평소 고기를 먹기 힘들었던 시절, 명절 때 돼지고기는 기름진 음식으로는 최고였다. 어머니는 녹두지짐이는 돼지비계 맛이라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싼값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돼지고기를 넣고 싶었던 건 아닌지…….

맷돌을 돌리던 형은 힘이 드는지 번갈아 손을 바꾸며 돌렸다. 녹두 한말은 한참을 갈아야 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나는 수저로 녹두를 건져 형이 돌리고 있는 윗 맷돌 구멍에 맞춰 넣었다. 맷돌 구멍이 작아 수저로 퍼 넣으니 고무대야의 녹두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급한 맘에 구멍에 녹두를 많이 넣으면 맷돌 위로 녹두알이 넘쳐 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녹두지짐이의 맛은 맷돌에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어머니는 부엌일 중에 나와 녹두가 잘 갈렸는지 손으로 비벼보곤 했다. 그때마다 녹두는 너무 안 갈려도 그렇지만 너무 곱게 갈려도 맛이 없다고 말했다. 되직하게 갈린 녹두를 큰 양재기로 옮긴 후 허리를 펴고 눈을 들어 보면 창문 너머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쳤다.

어머니의 녹두지짐이에는 별다른 양념이 들어가지 않았다. 김치에 양념이 배어있고 맷돌에간 녹두가 고소해서 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고 했다. 녹두지짐이는 슴슴해야(간이 ‘심심하다‘의 이북식 사투리) 제 맛이라며 소금 간도 하지 않았다. 잘게 썬 김치에 고사리, 숙주나물 그리고 비계가 반인 돼지고기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밀가루와 물로 자작하게 반죽을 하면 반죽은 금방 두 배로 불어났다.

녹두지짐이를 부치는 일은 우리 집 명절의 고된 일 중 하나였다. 어떻게 부치느냐에 따라 녹두지짐이의 맛이 틀렸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녹두 가는 것은 맡겼지만 부치는 일만큼은 손수 하셨다. 사실 어머니의 녹두지짐이는 크기가 엄청 커서 다른 사람이 따라 할 수도 없었다. 뒤집다 쉽게 찢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큰 녹두지짐이를 잘도 뒤집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큰 국자로 퍼서 허투루 펴는 것 같은데 뒤집어 놓고 보면 정확히 원형이었다. 어머니는 딱 한 번만 뒤집었다. 자꾸 뒤집으면 기름을 많이 먹어 느끼해진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시간을 귀신같이 아는지 뒤집어진 녹두지짐이는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 색깔도 예뻤다. 탄 듯 안 탄 듯 거무스름한 부분은 마치 어느 미술작품의 엑센트 표현 같았다. 어머니에게 녹두를 편편하게 펴고 뒤집는 시간은 성스러운 의식의 시간이었다. 나는 명절 때마다 어머니 곁에 앉아 이 성스러운 의식을 끝까지 지켜보곤 했다. 사실 내가 어머니 곁에 앉아 있는 건 녹두지짐이의 냄새가 너무나 고소하기 때문이었다. 먹고 싶어 침을 꼴깍 삼키면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명절 음식은 조상님 먼저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맨 마지막엔 양재기를 박박 긁어 부쳐 나에게 주었다. 나는 그렇게 기다려 조상님보다 먼저 녹두지짐이를 맛보곤 했다. 간이 슴슴하니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한층 더해 정신없이 입에 넣었다가 입천장을 덴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녹두지짐이를 좋아했던 건 아닌 것 같다. 경상도 산골에서 자란 어머니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이북 평안도로 시집갔다. 시어머니는 명절이나 제사 때의 녹두지짐이를 어머니에게 맡겼다고 했다. 눈칫밥을 먹던 어머니는 녹두지짐이를 부치며 그 냄새로 배를 채웠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녹두지짐이는 시어머니 입맛에 잘 맞았는지 언제부턴가 시어머니는 녹두지짐이를 드실 때 어머니를 불러 같이 드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녹두지짐이를 통해 비로소 며느리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 왔다. 그 후로도 어머니의 녹두지짐이는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제삿날에는 더욱 정성스럽게 녹두지짐이를 부치곤 했다. 자식들이 출가했기에 조금만 하라 해도 어머니는 녹두지짐이만큼은 늘 많이 부쳤다. 어머니는 녹두지짐이를 부치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녹두지짐이는 어머니의 삶이었다. 명절이나 제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셨다. 나는 녹두지짐이는 더 달라고 해서 가져왔다. 그럼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가져온 녹두지짐이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몇 날 며칠을 먹었다. 프라이팬에 은근한 불로 데우면 고소한 맛이 다시 살아났다. 특히 돼지비계는 겉은 바삭해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비계는 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녹두와 합쳐지면서 지짐이의 풍미가 입안 가득했다. 이때 나는 바로 목 넘김을 하지 않고 천천히 씹으며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다. 그 순간은 바쁘게 살며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어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녹두지짐이를 좋아한다. 큼지막한 녹두지짐이 한 장은 한 끼 식사로도 든든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녹두지짐이에 막걸리 한잔하면 세상이 행복하다. 하지만 나는 녹두지짐이 먹기가 겁난다. 한 점 떼어 베어 물면 어머니 생각이 나고 거기다 막걸리까지 한잔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녹두지짐이, 그리고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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