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쓰는 글보다 맘으로 쓰는 글이 더 아름답다
마음으로 쓰는 할머니들의 글
"자꾸 나 시키면 낼부턴 안 나올겨"
옥자 할머니가 나를 협박한다. 그러자 단짝인 옆자리 영금 할머니가 한마디 거든다.
"얀년아! 선생님이 너 글 가르쳐주느라 고생인디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어!"
옥자 할머니는 85살, 영금 할머니는 82살이다. 둘은 친구처럼 지낸다. 문해교육 초등, 중등과정을 마치고 중학교 졸업장을 받기까지 4~5년을 같이 붙어 다녔다. 여기는 서울시교육청 산하기관인 00평생학습관. 나는 글쓰기 선생. 학습자는 문해교육 중등과정을 마친 할머니들(할아버지는 한 명도 없다), 우리 반 학생은 모두 16명. 70대가 반, 80대가 반이다. 옥자 할머니는 우리 반에서 제일 나이가 많다. 쾌활한 성격에 목소리도 어찌나 큰지 뭐라 한마디 하면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가 세명, 나머지는 문해교육 초등과정을 마치고 중등과정에 진학 중학교 졸업장을 취득하였으니 과정마다 3년의 긴 시간을 견뎌낸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우러나온다.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 조건은 딱 하나, 2/3 출석이다. 별도로 성적을 체크하진 않는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장을 갖고 있지만 문법이나 어휘력이 부족하여 받침이 틀리거나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할머니들은 손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동사무소나 은행에 갔을 때 자기 이름을 쓸 줄 몰라 창피했던 기억을 말할 땐 눈시울이 붉어졌고 그런 설움을 딛고 할머니들은 자기 이름을 쓸 줄 알게 되었고 지금 나의 고향에 대해, 어린 시절에 대해, 나의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비록 맞춤법이 틀리고 비문이 많지만 나는 글 안에 들어있는 할머니들의 맘을 다 읽을 수 있다.
"제가 태어난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000 000입니다. 저는 8남매의 첫딸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산으로 둘러 쌓여 골짝에는 밭 분이었습니다. 접접 산골이었습니다 (중략).
어린 동생을 업고 돌을 덩지면 참새가 날아가 다른 논에 안자 벼를 쪼아 먹으면 어린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저기 학교 가는 친구 보면 피해 돌아다녔습니다"
여든이 넘은 강순 할머니는 8남매의 첫딸로 태어나 동생들 돌보느라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운 70대 중반에 연필을 잡았다. 초등, 중등과정 장장 6년의 시간은 강순 할머니 맘속의 응어리를 푸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손이 아닌 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할머니를 내가 평가할 자격이 있겠는가. 나는 할머니 글을 보고 그저 이 말만 할 뿐이다. '할머니! 정말 정말 잘 쓰셨어요' 그리고 엄지 척.
"나는 먹고 사는 게 어려웠다. 나는 어머니에 맞딸로 태어났다. 집에 돈이 없서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서 동생들을 보살피르라 공부를 때를 놓첬다. 그래서 저는 달력 보는 것도 잘보지 못했다. 저는 20십살리 되어서 교론식을 하였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나이는 팔십 평새이 오고 말았다. 이제 와서 공부를 할려고 하니 배우면 배운 대로 다 일러 버리고 만다'
영란 할머니는 무척 열심히 글을 쓰신다. 자꾸 까먹는다고 안타까워 한다. 그럼 나는 '80년 기억을 머릿속에 다 저장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터져버린다'며 나도 자주 깜빡깜빡 하니 당연한 거라며 맞장구를 쳐준다.
세계를 맘껏 다닐 수 있는 공짜여행 티켓을 받으면 뭐 할 건가로 쓰는 시간에는 '나는 애들을 무적군 주곘다'며 자식들에게 티켓을 다 주겠다는 자식 먼저 생각하는 착한 우리 할머니들.
받침이 좀 틀리다고 문장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문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한국인이 한글 문장을 이해 못 하지는 않는다. 좋은 글은 울림이 있다. 맘으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려한 문장 같은데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 것, 나는 그런 문장을 쓰려고 노력하는 건 아닌지 오늘도 반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