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을 넘게 달린 시간들. 지금까지 달린 거리를 재면... 아마도 2만 km 정도 되지 않을까?? 지구 한 바퀴가 4만 km니까 지구 반바퀴를 돈 셈이다. 그동안 런닝화도 이것저것 신어 봤다. 비싼 것도 있고 기능을 강조한 것도 있고. 마라톤 시작하며 혼자 뛰며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생각하며 달렸다. 그렇게 달리지만 기록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기록이 조금씩 좋아져야 뛰는데 동기 부여도 되고 더 강한(멀리) 달리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당시 나는 장비(?)가 잘 갖춰져야 기록도 좋아질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50대 초반 마라톤 시작한 지 일 년 후 상하이국제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첫 출전했다. 그때 런닝화를 고르느라 무척 신경 썼던 기억이 난다. 조금이라도 무게가 덜 나가는 런닝화를 찾아 이 브랜드 저 브랜드 신발을 신어보며 미세한 g 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실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신는 런닝화는 250~280g 사이로 별 차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마라톤의 흘린 땀은 런닝화로 커버되는 게 아니란 걸 알기까지 2~3년이 걸렸다. 지금은 하프코스까지는 대충(?) 신고 뛰는 편이다. 풀코스 42.195km 달릴 땐 신경 써서 신고. 풀코스에서는 무게보다는 착용감이 중요하다. 25km 지나면서 발이 부어 넉넉하던 런닝화가 조이는 느낌이 들고 특정 부위에 마찰이 심해 피부가 벗겨지거나 피멍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발의 모양은 다 다르고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의 모양도 다르다. 장거리를 뛰면 나는 오른쪽 검지발가락 발톱과왼쪽 약지발가락 발톱에 피멍이 잘 든다. 그래서 런닝화 발가락쪽 신축성이 좋은 것을 신는다.
런닝화 수명은 1,000km라고한다. 하지만 이건 선수들이 하는 말 같고 나는 2,000km까지는 신는다. 밑창이 조금 닳아도 그냥 신는다. 지금은 런닝화 탓을 하지 않는다. 밑창이 조금 닳았지만 착용감이 좋은 신발은 장거리에 짱이다. 순천울트라마라톤 102km 달릴 때 신은 런닝화는 3년 정도 신었기에 밑창이 닳아 뒤쪽은 홈이 보이지 않아 맨질맨질할 정도다. 그래도 이 런닝화를 신고 16시간 완주했다. 런닝화가 달리는 데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 건 인생에서 어려울 때 핑계 대는 걸 빗대어 질책하는 듯하다.
올 한 해 마무리는 역시 마라톤대회 참가다. 작년 11월에 하프코스 참가해서 1시간 48분을 기록했던 그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나이 먹으며 기록이 당겨지는 것은 내 인생에서는 엄청난 동기부여다. 실전 연습을 통해 기록경신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로 했다. 연습주로지만 전력 질주해야기에 신발장에서 어떤 런닝화를 신을까 다 꺼냈다.
사연을 담고 있는 런닝화들
4개의 런닝화. 다 사연이 있다. 가격도 천차만별. 30만 원짜리도 있고 8만 원짜리(맨 우측 그냥 운동화-트래드밀에서 뛸 때 신는다)도 있다. 가운데 두 개는 밑창이 닳았는데 버리지 않고 그냥 신고 달린다. 밑창이 닳았다고 기록이 나빠진다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닳은 밑창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연이 있다. 닳아 빠진 밑창은 땀의 대가다. 도전의 결과다. 신발에 얽힌 여러 사연이 그저 대견할 뿐이다.
내가 런닝화를 고를 때 좋아하는 브랜드는 나이키. 하지만 꼭 그 브랜드만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 특히 지금은. 그저 신어서 편하고 장거리 뛸 때 붓는 발에 끼는 느낌만 없으면 그만이다. 물론 사이즈 10cm 큰 것을 사야 하고. 나는 얼마 전 마라톤사이트 공동구매 행사에서 B급 브랜드 런닝화를 샀다. 50% 가격이기에 저렴하기도 해서 샀는데 160g 무게로 초경량이다. 닳은 런닝화를 버리긴 아까워 신발장에 두곤 있지만 새 런닝화를 하나 사려던 참이었다.
박스를 뜯어 새로 산 런닝화를 꺼냈다. 나는 이번 대회에 새 런닝화를 신고 또 한 번의 사연을 만들려고 한다.
새로 산 런닝화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어릴 때 불렀던 노래가 생각난다. 새 신을 신고 잠실운동장 방향으로 뛰었다. 1km를 5분에 뛰어야 이번 대회에서 기록 경신이 가능하다. 나는 처음부터 전력질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숨이 턱에 차오른다. 새로 신은 런닝화가 가볍다는 느낌뿐 어떤 테스트를 느낄 새도 없이 헉헉거린다. 10km쯤에서 시간을 보니 05:20/km. 이런 스피드라면 하프코스 기록은 1시간 50분이 넘는다. 런닝화가 문제가 아니라 평소 운동량이 문제였다. 나의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달리기를 게을리 했던 결과였다. 그래도 끝까지 달리자며 달렸다.
17.4km 05:23/km. 아무리 좋은 런닝화를 신어도 연습량을 초과한 기록을 만들어 낼 순 없다. 런닝화를 탓해서도 안되고 그날의 컨디션을 탓해서도 안된다. 기록은 그저 내가 뿌린 땀의 결과다. 결국 런닝화는 달리기에 부수적 조건인 셈이다.
넷플릭스 다큐-샌들의 마라토너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난다 '로레나 : 샌들의 마라토너'. 샌들에 치렁치렁 전통치마를 입은 로레나(멕시코)는 진흙과 자갈 투성이의 길을 달리는 100km 울트라마라톤에서 전 세계의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1등으로 들어온다. 이 다큐를 보며 누가 런닝화를 말하겠는가.
이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갖고 있는(그리고 그동안 닳아 버렸던) 런닝화에도 수많은 사연과 땀과 열정이 들어있다. 기록을 좌지우지 하는 건 땀이다. 런닝화가 좋다고(비싸다고) 잘 달린다는 건 아니다(그렇다고 로레나처럼 맨발로 뛰어서는 안된다).
나는 새 런닝화를 신고 천 킬로미터 이천킬로미터 또 달릴 것이다. 밑창이 닳아 구멍이 날 때까지 달릴 것이다. 새 런닝화의 밑창 구멍은 땀방울이며 그 땀방울은 허벅지의 근육으로 옮겨지고 가슴에는 열정으로 피어나고 머릿속은 냉철한 사고로 승화될 것이다. 역시 마라톤은 런닝화보다는 땀방울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