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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중에서
두번째로 어려운 책(4)

'문학이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

by 허무

내가 생각하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에 따른 진정한 문학은 마치 가늘고 날카로운 바늘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문학의 범주를 극도로 한정시키고, 그 범주 내에서도 다시 작가의 의도를 따져서 골라낸다. 그리고 독자에의 효용까지 고려해서 살아남는 작품들이어야만 사르트르는 문학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일제시대에 활동했던 문인들이 다수 여기 해당될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나라잃은 슬픔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을 글로 표현하고 읽는 우리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비분강개하여 지치지 않고 내 한 몸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충정을 불러 일으켰다.

반대로 일본군의 무력, 재력 등의 앞에 금세 굴복해버리고 일본을 따르길 종용하는 글을 쓴 작가들도 있었는데, 이 역시 사르트르가 비난하던 과거 프랑스에서 종교, 왕정, 재력 등에 굴복한 작가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에서는 앞의 논지들을 더욱 강화하면서도 특히 문학이 작가와 독자 상호를 연결해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애초에 사르트르는 작가가 글을 쓰면서 무개성의 랜덤한 대중이 자신의 글을 읽어줄거라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말을 빌자면, '보편적 독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 예로써 흑인작가 리차드 라이트(Richard Wright, 1908~1960)의 경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흑인작가로서 보편적 독자만이 존재한다면 리차드 라이트는 자신이 자라고 생활해온 환경에 맞는 언어(예를 들어, 흑인들의 슬랭 따위)로 글을 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리차드 라이트는 흑인의 이야기를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적 습관을 이용해서 작품에 적용했다. 사르트르는 바로 이 점이 미루어 리차드 라이트는 아주 지능적으로 실제 글을 소비할 수 있는 계층(백인 중산층 이상)을 공략하고, 그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한 메세지를 더 강력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영화 '타짜'에서 정 마담은 이렇게 독백한다.

화투판에서 가장 어려운 일. 어떻게 호구를 판때기에 앉히느냐. 일단 호구를 앉히기만 하면 판돈 올리기는 아주 쉽다.

리차드 라이트의 소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독자를 끌어다 책을 읽게끔 만들어 주면, 읽고 나머지는 독자 개인들의 영역인 것이다. 그럴때 어떻게 독자를 끌어당길 것인가. 바로 이 점에서 리차드 라이트는 흑인의 이야기를 흑인에게 보도록 하는 방식이 아니라 흑인의 현실을 상위계급의 백인들이 볼 수 있게 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그 책을 읽은 백인들 중 일부는 소설로 치부하고 덮어버릴수도 있겠지만, 일부는 자신이 모르던 비참한 인종차별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될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보편적 독자'가 아닌 진정한 독자(사르트르는 '구체적 독자'라고 표현했다.)를 고려하고 제대로 겨냥한 예이다.


사르트르의 정의에 따르면 문학은 실천적 행위이고, 작가는 반드시 구체적인 독자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응답하는 것이 그 문학의 존재 이유가 된다. 이 점에서는 사르트르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물론 자신의 심미적인 감상을 표출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역시 나는 존재가능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우리 일상을 빛나게 하니까. 그렇지만, 진지하게 내가 문학을 한다라고 생각하면 사르트르처럼 독자들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구체적 독자에 따른 요구를 수용하는 글을 쓸 것 같다. 단순히 판매 부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 글을 제대로 읽고 공감해줄 '구체적 독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한다.


이상으로 참으로 어설프지만, 세계의 대문호이자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 장 폴 사르트르의 명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내가 받은 인상과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보았다. 많은 글이나 영화 등이 그러하듯 이 책도 단순히 이렇게 '읽었다'라는 걸로 만족하고 끝내버린다면 사실 몇 달만 지나더라도 전혀 남는게 없을 듯 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또 한편으론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인건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보게 되실 분들 또는 보신 분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분명 내가 느끼고 배운 점이 정답은 아닐테고, 전혀 상반된 의견을 가진 분들도 계실터. 나는 조금이라도 그런 의견들을 나누고 서로 배울 수 있으면 더 여한이 없을 듯 하다.


다시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면서, 그래도 언젠가 또 인용을 위해서라도 꺼내어 펴 볼 날이 오겠지 하며 기대를 한다. 마지막으로 거의 다 잊었지만, 오래전에 배운 불어로 인사를 해 본다.

"D’ici là, portez-vous bien, Monsieur Sartre.(그때까지 잘 계세요, 사르트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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