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
앞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입장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2장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와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에서는 작가에게 엄청난 사회적, 역사적 책무를 안겨주고 있다.
먼저 나는 이런 사르트르의 의무론적(?) 작가관에 대해서 일부 비판적인 입장임을 밝혀둔다. 그렇다면 앞의 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사르트르가 작가, 글쓰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책무에 대해 2장과 3장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조금 더 깊이 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사르트르가 원하는 작가의 책무를 내 나름대로 요약을 해보자면,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억압받는 피지배계급을 계몽하는 일"이라고 해당된다.
앞서 1장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문학의 정의를 내리면서 '시(詩)'를 배제하는 아주 편협하게 보여질법한 엄격한 분류를 감행한 바 있다. 그 이유로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어떤 '서사'를 전달하여 독자로 하여금 무언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이미지'를 날 것 그대로 표현(사르트르는 <표상>이라고 하여 구분하였다.)하는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를 '글쓰기'와 구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작가라고 하면 독자를 겨냥하여 쓰되, 소위 곡학아세(曲學阿世, 정도에서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함)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계급의 불평등에서 오는 부조리와 피지배계급의 자유 또는 해방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하고, 그런 글만이 제대로 된 '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나는 사르트르의 이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한편, 지나치게 그 책무를 부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일단 문학 역시 음악, 미술 등과 마찬가지로 나는 예술의 한 갈래라고 본다. 그것이 사회적 메세지를 담고 있지 않고, 가벼운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이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언어를 아름답게 구사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이미지를 자아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문학의 가치는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메세지를 함께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겠지만 말이다. 모든 사람이 사회적으로 '쓸모있는'사람이어야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리고 만약 작가 자신은 '계몽'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이 미처 알지 못하는 그릇된 생각이라면? 그 생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고 잘못된 가치관을 갖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예전 텔레비전에서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가 떠올랐다.
'개그는 개그일 뿐, 따라하지 말자.'
나도 똑같이 신랄한 사르트르에게 말해주고 싶다. 문학은 문학일 뿐, 심각하지 말라고...(그렇다고 심각한 문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각각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17세기부터 당시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문학 사조를 상당히 신랄하게 비판을 가한다. 이 부분에서는 그의 실존주의적 관점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비판하는 과거 문학들을 보면, 교회가 득세할 때에는 교회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과 왕권이 강할때는 왕정을 찬양하거나 미화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시민혁명 이후에는 부르주아의 물질주의를 숭배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실존주의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윗 단락에서 언급한 글처럼 작가의 자유의지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그리고 독자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문학이 아닌, 권력에 잘 보이기 위해 또는 포교나 선전미화 등의 목적을 위해 쓰인 글들은 사르트르에겐 문학이라 부를 수도 없는 그저 역사의 한 갈래 쯤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명제를 상당한 자유도가 허락된 문학이라는 장르로 가져와 그 잣대로 평가한 모습은 과연 실존주의의 대표 철학자 라고 불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