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롄커, <사서(四書)>를 읽고
사서(四書)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이 네 권의 책을 가리킨다. 애초에 옌롄커 작가의 <딩씨 마을의 꿈>을 먼저 읽어본 터라, 제목처럼 고전적인 느낌은 절대 아닐 것임을 예상은 했다.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몇 번이나 나는 차례를 다시 찾아보고, 책의 제일 뒤에 해설은 없는지 찾아보았다. 그리곤 작가의 '한국어판 서문'을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하지만, 전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은 없었다.
우선 이 책은 제목처럼 네 권의 책, 『하늘의 아이』『옛길』『죄인록』『시시포스의 신화』를 마치 복원하여, 내용의 상관성에 맞춰 구성해 놓은 듯이 되어 있다. 즉 저 한 편, 한 편이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 목차에서 제5장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제5장 『옛길』, 『죄인록』, 『하늘의 아이』
1. 『옛길』 p69~p81
2. 『죄인록』 p129~p130
3. 『하늘의 아이』 p111~p115
4. 『옛길』 p100~p108, p133~p139
5. 『옛길』 p139~p145
이 무슨 해괴한 구성이란 말인가. 심지어 저 페이지들은 실제 책의 페이지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분실된 기록의 복원]이라는 메타픽션적 장치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독자를 미궁에 빠뜨려,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가 얼마나 파편화되어 있는지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을 다 읽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작부터 온통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지만, 해설 한 줄 없으니 그저 책을 읽으며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활어의 배를 가르는 문장들]
다행히 서사는 굉장한 몰입감을 갖고 있어서, 해괴한 구성을 금세 잊을 수 있었다. 다만, 처음에 익숙하기 힘든 성경을 차용한 듯한 문장들이 나오는데, 이는 결국 마지막 결말에 이르러서 작가의 광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신랄한 비판의 도구로 활용된다. 심지어 '하늘의 아이'라는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내가 이 책을 마지막 장을 넘기며 속으로 삼킨 말은 "미쳤다. 정말 미쳤네." 였다.
이 책은 마치 눈 앞에서 펄떡거리며 살아 숨쉬는 활어를 큰 부엌칼로 목을 쳐 날리고, 배를 따서 내장을 손가락으로 싹 훑어 끄집어낸 다음, 물에 헹구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는 느낌이었다. 참고로 나는 활어회 손질하는 것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걸 보고 있자면 징그럽다고 느끼고, 내가 직접 하고 싶지 않다. (생업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습니다.) 옌롄커는 중국 공산당 정부라는 활어에 큰 칼을 들이 밀고, 그 속을 다 까발려버린다. 이는 <딩씨 마을의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옌롄커의 실존적 글쓰기]
한국어판 서문에서 옌롄커는 '글쓰기의 반역자'라고 자신을 일컫는다.
그는 작품 중에 '작가'라는 인물에 자신을 투사하여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것과 그가 군인으로 복무했다는 것을 연관지어 보면 일차적으로 그가 왜 '반역자'라고 스스로를 일컫는 지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또한, 그가 중국 정부의 금서 딱지를 수집하다시피 하면서도 계속 쓸 수 밖에 없는 이유 역시,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적 글쓰기'와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에게 글쓰기는 형벌인 동시에,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알리바이였다.
이 점은 자신이 조국의 반역자가 되더라도 조국의 민낯을 비판적으로 까발리는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그것이 마치 천명인 것처럼 여기는 작가의 태도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실제 작중 '작가'라는 캐릭터도 『죄인록』을 쓰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맞기도 하고, 수모를 당하기도 하는 장면들은 어쩌면 옌롄커 자신의 글쓰기 역사를 녹여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실주의(神實主義)]
또한, 초중반의 부조리한 현실을 후반부에서 환상주의적으로 풀어내는 방식 또한 탁월하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주의가 아니다. 옌롄커는 이를 '신실주의'라 부른다. 눈에 보이는 사실(Real) 너머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Truth)을 드러내기 위해 그는 기꺼이 광기의 칼을 든다. 그러한 점에서 라틴문학(마르케스, 보르헤스 등)에서 보여지는 환상주의와는 색깔이 사뭇 다르다. 라틴문학의 환상주의가 총천연색의 화려함이라면, 엔롄커의 신실주의는 무채색에 가깝다. 아름답지 않고 그로테스크하다.
옌롄커의 특유의 신실주의는 추악함을 기괴하게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또한 그의 기괴함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더 일그러질수록 그 현실은 뼈저리게 아프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허무'를 이기는 '연민'의 힘]
하지만 '허무주의'는 아니다. 후반부의 말도 안되는 극한 상황을 서술하면서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끈'을 놓진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마지막, 모든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아이의 곁을 지키는 '학자'의 뒷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아이를 증오로 갚는 대신, 죽어가는 한 인간으로서 끝까지 대면한다. 비록 세상은 시체를 뜯어먹는 아비규환이었을지언정, 마지막 한 사람이 지켜낸 그 '윤리적 자존심'이야말로 옌롄커가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아픈 위로이자, 이 책이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지 않는 단단한 지지대였다.
또한 이는 작가가 군인으로 복무하면서 중국의 현실 내부에서 객관적으로 직시해온 세월의 힘과 그의 안에서 잠자는 '애국심', 지독한 짝사랑같은 '忠'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 장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작가는 작품의 의도와 해석을 신실주의적으로 하고 있다고 나는 보았다. 우리가 아는 무한히 바위를 밀어올려야 하는 형벌을 수행하는 시시포스를, 살짝 비틀어 '도깨비 비탈(오르막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내리막인 착시를 일으키는 경사면)'에서 굴리는 형벌로 전환한 점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도깨비 비탈에서 바위를 굴리는 건 쉬운 일 아니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글에서 '신'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산 정상에서 도깨비 비탈로 아래로 바위를 힘주어 굴려서 내려가도록 만든 것이다. 그게 뭐? 똑같은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르막으로 바위를 굴리며 올라가면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 그러나 내리막으로 가면서 힘주어 가려면 그런 여유는 사라진다. 잠시의 한눈조차 팔 수 없게 만드는 게 '신'의 의도인 셈이다. 정말 기가 막힌 알레고리가 아닐 수 없다.
제목 <사서>와 관련해서도 분서갱유나 문화대혁명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작가는 자신의 조국에 대해 대담한 도발을 멈추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바위를 굴리는 언덕은 '도깨비 비탈'은 아닌걸까?
하늘을 보지 못한 채, 누군가 정해준 중력에 순응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