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하지 않는 드라이함의 미학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고

by 허무

펠리시아가 낯선 도시에서 길을 헤매는 모습은 단순히 위협을 묘사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외'라는 실존적 무게를 독자의 피부에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사건의 해결보다 자아의 붕괴에 집중하는 후반부의 혼란스러운 연출은, 장르적 쾌감보다 문학적 여운을 선택한 작가의 고집스러운 결단으로 읽힌다.

고전 중에서도 문학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보통 세계적으로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떠올리곤 한다. 특별히 어느 국가에 한정됨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내가 영미문학에 굉장히 소홀하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책을 적게 읽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영미권 작가의 작품들은 거의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적나라하게 얕은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부끄러움이 나를 윌리엄 트레버라는 거장 앞으로 이끌었다. 부랴부랴 제미나이에 추천을 받아서 조금씩 접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펠리시아의 여정> 이 그렇게 읽게 된 작품이었다.


작가도 생소하고, 작품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이지만, 기본적인 문체가 상당히 깔끔했다.

보통 내가 습작을 쓰고 나서 교수님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평을 들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지나치게 문장이 길고, 설명이 많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가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자세히 설명하고, 그리듯이 묘사하는게 어때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윌리엄 트레버는 이 점에서 완벽한 합의점을 찾은 듯 하다. 그의 장면 묘사는 엄청나게 디테일하다. 그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집요하게 묘사할 뿐이다. 작가가 목소리를 높여 해석을 강요하는 대신, 드라이한 문장들로 독자를 풍경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이런 점이 독자들에겐 몰입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기차에 사람들이 들어찬다. 말없이 신문을 읽고,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곧 시선을 돌린다. 모든 것이-사람과 집과 차, 철탑과 안테나-전부 자리잡을 만큼 넉넉한 공간은 없다는 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역이 아닌 곳에서 기차가 멈출 듯하자 사람들 얼굴에 초조함이 떠오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면서도 '전부 자리잡을 만큼~ 붙어 있다' 같은 위트있는 비유를 놓치지 않는다. 기차가 역 아닌 곳에 멈추려 하자 왜 사람들이 초조해하는지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다. 읽는 사람 각자의 영역에 맡길 뿐이다.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하면서도 독자의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는, 이런 드라이함이 이 글의 매력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화장면처럼 묘사한 것 뿐만 아니라, 1999년에 실제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image.png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기 전부터 나는 묘하게 이 글이 영화 <러블리 본즈>와 닮은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의 진가는 스릴러라는 장르적 골격 위에 순수문학의 살을 입혔다는 점에 있다.

치밀한 묘사에 이은 악인 '힐디치'의 악행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부터 이 작품은 굉장히 스릴러적으로 흘러간다. 물론 초반에 가출한 펠리시아가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떠도는 모습부터가 굉장한 빌드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결말까지 마음을 졸여가며 읽게 만든다.


그러나 스릴러 장르의 소설들과는 다른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첫째, 인간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고 있다.

힐디치라는 악인은 그냥 '나쁜 사람'이 아니다. 물론 일상 생활에서는 평범하고 예의바르기까지 한 싸이코패스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 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즉, 인간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완급조절이 스릴러 소설과 다르다.

대개 스릴러 소설에서는 속도감을 강조한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트레버는 굉장히 디테일한 묘사를 구사하여 느리고, 정교한 묘사에 집중한다. 펠리시아가 낯선 도시에서 길을 헤매는 모습은 단순히 위협을 묘사하는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소외'라는 실존적 무게를 독자의 피부에 전이시키는 과정이다. 사건의 해결보다 자아의 붕괴에 집중하는 후반부의 혼란스러운 연출은, 장르적 쾌감보다 문학적 여운을 선택한 작가의 고집스러운 결단으로 읽힌다.


셋째, 사건보다 심리에 집중한다.

결말을 언급하진 않겠지만,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사건보다도 자아의 붕괴, 심리적 혼란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실제 후반부를 읽는데 굉장히 깔끔하게 정리되는 초반과는 달리 환영과 현실의 혼재등으로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넷째, 상징적 밀도가 압도적이다.

사물과 배경이 단순히 배치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그것은 인물의 사회적 위치나 심리 상태를 반영하여 보여준다.

"그는 큰 응접실에서 시계태엽을 감는다. (중략) 시계 소리를 듣는 일이 좋았다. 그는 일렉트로룩스 청소기로 응접실과 현관과 계단, 침실을 청소한다. 욕실과 화장실의 리놀륨 바닥을 대걸레로 닦고 허브 향수를 뿌려 향이 나게 한다."

이런 장면도 단순한 묘사같지만, 인물의 결벽증과 주도면밀함을 볼 수 있다.


<펠리시아의 여정>은 정말 순식간에 쉬지도 않고 끝까지 읽어버린 책 중 하나다. 요즘엔 그렇게 집중하기 쉽지 않았는데, 문장들의 흡인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앞서 <러블리 본즈>라는 영화가 생각났다고 했는데, 중반부에 방문 선교를 하는 캘리거리의 등장부터는 최근 휴그랜트가 출연한 영화 <헤레틱>도 떠올랐다.

image.png 휴그랜트의 악역이 돋보이는 영화였다.

윌리엄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너무 재미있게 봤고 배울점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마무리가 갑작스럽달까, 조금 맥빠지는 듯한 결말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게 어쩌면 이 작품의 순수문학적 가치를 높여주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설명하고 싶은 유혹을 참고, 사물의 질감을 드라이하게 던져두는 것. 그것이 독자의 영역을 가장 존중하는 방식임을 트레버를 통해 배웠다. 나의 다음 문장 역시 그 '드라이한 진실'에 닿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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