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그의 단편을 몇 작품 읽었을 뿐인데, 지금은 그의 이름을 내 입에 담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지경이다. 글, 그것도 단편 몇편에 이렇게 경외심을 느낀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대성당>
이 단편은 최근 유튜브의 내 알고리즘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수의 리뷰 영상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했다. 카버의 최고 걸작이라고 여겨지는 작품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고. 나도 카버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먼저 접하게 됐는데, 정확히는 두 작품을 비교해서 보라는 제미나이의 추천이었다. 참고로 추천한 다른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대주교'였다.
부끄럽게도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라 불리는 상허 이태준의 정교하고 유려한 묘사를 문학의 정전으로 삼아왔던 내게, 카버의 '미니멀리즘'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이태준의 문장이 빈틈없이 메워진 '풍경의 완성'이라면, 카버의 문장은 깎아내고 남은 자리에 심연을 채워 넣는 '생략의 미학'이었다. 쇼잉(Showing)이 단지 기교가 아닌, 작가의 철학적 결단임을 카버를 통해 처음으로 뼈저리게 실감했다. 얼핏 차갑고, 건조하고, 불친절하게 보이지만, 그 문장들이 품고 있는 이미지나 함의들은 카버의 단편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곱씹게 만들었다.
[감자의 은유]
"미쳤어?" 아내가 말했다. "지금 돌아버린 거야, 뭐야?" 그녀는 감자 하나를 집었다. 나는 그 감자가 바닥을 때린 뒤 레인지 아래로 굴러가는 것을 봤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술 마셨어?"
이 부분에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대체 왜 '감자' 하나에 카버는 집착한 것일까?
미니멀리즘의 대가 카버가, 감자 하나가 그녀의 손을 떠나 레인지 아래로 굴러가는 것을 저렇게까지 묘사했다고? 카버가 아무런 의미 없이 저런 문장을 내버려 뒀을리 없었다. 아마도 감자는 화자인 '나', 즉 남편인 주인공의 처지를 투사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던져져서 레인지 밑에 처박히는 신세, 즉 아내에게 공감을 하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남편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레인지 밑으로 굴러간 감자를 잊어버리고 제때 치우지 못한다면? 상해서 냄새가 나거나 벌레가 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속에 남편을 저렇게 한 구석에 던져두고 잊는다면 남편도 그런 신세가 되지 않을까?
과하게 끼워맞추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다른 부분을 보자.
맹인은 술을 한 모금 맛봤다. 그는 손으로 턱수염을 올려서 냄새를 맡아본 뒤, 다시 내렸다.
이 문장에서 맹인의 성격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안 보이지만,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맹인으로 지낸지가 오래된 사람이라는 것. 또는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른 법이니까.
[반전]
기본적으로 집에 손님으로 온 맹인은 아내와 친분이 있다. 남편은 굉장히 어색해하고 오기전까지는 못마땅해한다. 남편의 언행들로 보아 굉장히 속이 좁고 이해심이 없는 사람이다. 반면 아내는 긴 시간 맹인을 위해 일을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없는 듯 보여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로버트?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아내가 물었다.
"괜찮아."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이 부분에선 정확히 역전되고 있다. 아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물론, 졸다가 깨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지만, 남편은 이제 맹인과 점점 교감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결말을 위해 아내 역시 진심으로 맹인과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차례 보여준다. 즉, 아내도 결국 맹인을 이해하는 '척' 했던 것이다.
아내는 입을 가리더니 하품을 했다. 그녀는 기지개를 켰다. "위에 가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올게요.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어요. 로버트, 편하게 계세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도 편안해." 맹인이 말했다.
"우리집에서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편안하다니까." 맹인이 말했다.
여기서 아내는 로버트(맹인)가 편안하게 느끼길 원한다면서 재차 확인하려 한다. 로버트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아내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슷한 장면이 뒤에도 또 이어진다. 졸리지 않다는데도 졸리면 침실로 안내해주겠다고 하는 장면이다. 결국 표면적으로 맹인과 친분이 있고, 충분히 교감하는 듯 보이던 아내가, 그것이 정말 '표면적'일 뿐임을 드러낸 셈이다.
[결말]
나는 감상문에서 보통 결말을 이야기하면 조금 힘이 빠질 수 있어서 되도록이면 언급을 피하려고 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대성당>은 워낙 유명한 글이기도 하고, 짧은 단편이라 결말을 알고 본다고 해도 그 감동이 덜하진 않을 것이란 판단 하에 내 감상을 조금 덧붙이고자 한다.
남편은 맹인과 TV를 시청한다. 어색함을 없애려 TV에 나오는 장면들을 설명하려 애쓰다가 '대성당'이 나와서 그것을 설명한다. 말로 설명이 쉽지 않자, 남편은 맹인에게 사과를 한다. 그러자 맹인은 그려보라고 한다. 그러면 사진이 그리는 남편의 손을 잡고 짐작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망설이는 남편은 맹인의 말대로 시도를 하면서 차츰 몰입하게 되고, 맹인의 눈을 감고 보라는 말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우선, 내가 본 한국어판(<대성당>,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김연수 옮김, 2022)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건방지게도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이 어딘지 어색하다고 느꼈다. '대단하다'고? 뭐가? 흐름상 남편의 마음은 이제 슬며시 열리고 있는 순간인데, 바로 대단하다고 느껴버린다고? 이런 의문이 들어서 인터넷에서 영어 원문을 찾기 시작했다.
"It's really something," I said.
이렇게 되어 있었다. 분명 느낌이 달랐다. 굉장히 고지식-한편으론 무식하고, 꽉 막힌 사람이었던 남편이 짧은 시간동안 맹인과 대화, 식사 등을 나누며 점점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에는 분명 "정말 뭔가 있네요." 정도의 느낌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눈을 감고 맹인과 같이 대성당을 그리면서 공감은 했을지언정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이 마지막 문장은 뇌리에 박혀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솔직히 <대성당>을 처음 볼 때, 약간은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저 마지막 문장을 보고서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으면서 저 화룡점정과 같은 문장은 절대 한 순간에 나오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큰 바위를 깎고 깎아내서 그 속에서 저런 보석같은 문장을 꺼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존경심이 생겨났다.
실제 카버의 창작 과정에는 편집자 고든 리시(Gordon Lish)라는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다. 리시가 카버의 초고를 절반 가까이 잘라내며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만들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훗날 카버는 그 무자비한 삭제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분투하기도 했다. 작가는 지워내야 하는 운명이지만, 동시에 지워지는 문장 하나하나에 자신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비명을 지르는 존재다. 그런 치열한 난투 끝에 남겨진 문장들이기에, 카버의 글은 그토록 진한 풍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보지 못하는 눈으로 대성당을 그렸고, 나는 눈을 감음으로써 비로소 '정말 무언가(Something)'를 보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문장은 내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거대한 바위를 깎고 깎아 그 핵심에서 보석을 캐낸 듯한 이 결말 앞에서 나는 경건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은 비대해질수록 의미는 빈약해진다. 많이 말하려는 욕망을 누르고, 내 진심이 단 한 문장에 온전히 실릴 수 있도록 오늘도 나는 수많은 말들을 지워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