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읽고,
어릴적부터 제목만큼은 지겹도록 들어오던 그 소설, 심지어 대중가요에도 같은 제목의 노래가 있던 그 소설을 이제야 제대로 읽었다. 배움과 깨우침이 늦은 것은 부끄럽지만, 지금 하지 않으면 아예 못하고 지나가는 일들이 생길까봐 생각나는대로 하나씩 해나가는 중이다.
우선 난 어릴때부터 저 제목, "무기여, 잘 있거라"를 문법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기가 뭔데? 武器? 아니면, 사람 이름이야? 뒤에 잘 있거라, 라고 말하는 걸 보니 사람 이름 인가보군. 대충 이런 식의 언어적 오해로 점철된 긴 세월이었다. 영어를 알고 나서야 'Farewell to arms' 라는 것을 보고 감을 잡았다. 좀 더 이해가 빠르게 번역을 해 본다면 어떨까, 하고서 생각한 것이 '무기들에게 작별을' 정도? 기회가 된다면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
좋은 버릇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느새 글을 읽을 때면 자연스레 작품 외적 요소를 찾아보게 된다. 굳어버린 습관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 작가의 생애에 집중한다. '어떤 상황에서 이런 글을 쓴 것일까? 그의 배경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등이 주요 관심사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는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헤밍웨이는 실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중 부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 탄생한 글이 바로 <무기여 잘 있거라>이고, 이는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이 외에도 그의 전쟁 경험은 있으나, 이 글이 탄생한 이후의 경험들이라 언급하진 않겠다.
난 이 자전적 성격이 결국 그의 작품 세계의 전체 성격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크게 헤밍웨이를 관통한다고 일컬어지는 세가지 요소는 바로 [하드보일드(Hard-boiled)], [나다(Nada)], [빙산이론]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결국은 전쟁이 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는지, 그의 작품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할 수 있다.
[하드 보일드 (Hard-boiled)]
헤밍웨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헤밍웨이는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기껏 본 책이라곤 <노인과 바다> 뿐이었고, 그마저도 기억나지 않았다. 최근에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는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헤밍웨이 정도가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헤밍웨이 하면, 항상 '하드보일드'라는 말이 따라 붙는다. 정확히는 'Hard-boiled Egg', 즉 완숙 계란을 의미했다. 계란이 완숙으로 익으면 단단해지듯이 형용사, 부사 등의 감정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냉정·건조한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스타일을 말한다. 개인적으로 용어에 대한 딴지를 걸자면, 완숙계란이 주는 따뜻한 이미지와 부드러운 식감과는 조금 이질적이지 않나 생각도 든다. 내겐 <노인과 바다>에 대한 기억(어릴 때 읽은)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강했다. (자세한 건 차후에 <노인과 바다>에 대한 리뷰에서 다루려 한다.)
완숙 계란은 액체같던 것이 단단하게 익은 상태다. 속은 퍽퍽하기까지 하다. 헤밍웨이의 문체도 마찬가지다. 감정이라는 수분을 다 빼버리고 단단한 사실(Fact)만 남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퍽퍽한 계란 노른자에 목이 메듯, 그 퍽퍽한 문장을 씹다 보면, 지독한 슬픔이 뒤늦게 올라온다. 내가 느낀 그 '따뜻함'은 아마도 차가운 문장 뒤에 숨은 남은 인간애,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두다리에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군화 속도 축축하고 따뜻했다. 나는 포탄 파편에 맞은 것을 깨닫고 몸을 구부려 손으로 무릎을 더듬었다. 무릎이 없었다. 손을 쭉 뻗어 보니 정강이까지 내려가 있는 무릎이 만져졌다.
부상으로 인한 두려움, 혼란은 물론, 심지어 통증마저도 그는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로봇이 자가진단을 하고 있는 모습같이 비쳐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성하다느니, 영광스럽다느니, 희생을 했다느니 하는 공허한 표현은 늘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중략) 나는 결코 신성한 것을 눈으로 본 일이 없었고, 영광스럽다는 것에서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 (중략) 도저히 귀로 들어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들이 너무 많다.
이 부분은 마치 일종의 '하드보일드 선언'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하드보일드의 대가 답게, 그의 문장은 굉장히 단단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도 수식이 별로 없지만, 그의 문장은 투명하고 명료하다면 헤밍웨이의 것은 상당히 단단한 느낌이다. 카버의 문장이 유리창처럼 그 너머의 진실을 투명하게 비춘다면, 헤밍웨이의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철 탄환' 같다. 카버가 '비어있는 공간'에 집중한다면, 헤밍웨이는 '부딪혀도 깨지지 않는 실체'에 집중한다. 제목 속의 '무기(Arms)'가 주는 금속성의 질감은 그의 문장,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나다(Nada)]
헤밍웨이가 전쟁터에서 마주한 것은 영광이 아니라, 육체가 파편화되는 물리적 고통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無, Nada)'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과 전쟁에 대한 글쓰기를 통해 '아무것도 없는'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몸 속 깊이 새긴것일 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도 교전상태에서 적병, 아군 병사들의 죽음은 영화처럼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비'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삶과 죽음이라는 개인에게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을 전쟁이라는 부조리한 상황이 무자비하게 소비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간호사들을 내보낸 다음 문을 닫고 전등을 껐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마치 조각상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병실에서 나온 나는 병원을 벗어나 비를 맞으며 호텔을 향해 걸었다.
가장 마지막 단락에서도 화자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말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문장이다. 다만, 이런 하드보일드의 이면에는 감정을 거세당한, 즉 허무에 잠식된 영혼이 있었던 탓이다. 즉, 작품 내내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아우라는 헤밍웨이의 전쟁 경험과 심지어는 그의 불우한 마지막까지 결부되어 그와 이 작품을 떼려야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빙산이론]
빙산은 일부만이 수면 위로 드러나 있을 뿐, 거대한 대부분은 물 속에 잠겨 있다. 헤밍웨이는 수면 아래에 잠긴 부분들은 독자의 추론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수면 아래 부분이 바로 감정, 배경, 함의 등이 해당되는 것이다. 결국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이유도 바로 이 빙산이론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이 작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헤밍웨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장면들만 보더라도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다만 저 장면에서 읽고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오롯이 독자의 몫인 셈이다.
빙산이론은 작가의 불친절함이 아니라, 독자에 대한 최고의 신뢰다. 헤밍웨이는 독자가 문장 사이의 '빈칸'을 스스로 채울 수 있는 지적인 존재라고 믿었다. 주인공이 빗속을 걸어갈 때, 작가는 그가 운다고 쓰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수면 아래 잠겨 있는 거대한 슬픔의 무게를 느끼며 비로소 그와 함께 젖는다. 8분의 7을 숨김으로써, 오히려 8분의 8 전체를 독자의 심장에 박아 넣는 방식. 그것이 헤밍웨이가 세상을 대면하는 법이었다.
이 글을 써내려가면서 점차 내가 왜 이 소설의 제목을 '무기들에게 작별을'이라고 부르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헨리가 떠난 것은 전장(Arms)만이 아니었다. 그는 연인의 품(Arms)에서도 밀려났고, 세상을 의미 있게 지탱해주던 모든 환상과도 작별했다. 비를 맞으며 호텔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나다(Nada)'의 바다 위로 떠 있는 고독한 빙산의 일각이었다.
지독하게 건조한 이 소설이 빗물처럼 눅눅하게 내 마음에 남는 이유는, 아마도 나 역시 내가 짊어진 무기들과 작별해야 할 어느 비 오는 날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버의 틈새에서 발견했던 '어떤 무언가(Something)'는, 헤밍웨이의 빗속에 이르러 '아무것도 아닌 것(Nada)'이 되어 흩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