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이 없는 사람은 사실상 동물에 가깝다.
"취향이 없는 사람에게 감춰진 매력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위 가설에 해당하는 한 이야기를 소개 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한 남자가 평범한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던 일상을 설명한 이야기다.
남자는 아침부터 일정이 좋지 않았다. 대출 연장 신청을 하러 일찍이 은행에 가야 했기에. 대출은 풀리지 않는 난제다. 어느사이에선가 남자는 이 난제를 풀려고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오히려 사랑해주기로 했다. 마치 평생 갓난아이 늦둥이 동생을 둔 것 처럼 아껴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일뿐, 대출연장신청을 하러 가는 기분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특히, 추운 겨울. 새해가 지나가기 바로 직전에 마주친 이 애물단지는 남자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 뿐이었다.
남자로선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차피 흘러가야하는 하루를 대출과 함께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은행으로 가는 버스를 타며 고심했다. 결론은 '잊자'라는 테마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대신에 그는 마귀들이 우글거리는 은행을 벗어나자마자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을 찾기로 했다.
종로 00은행 본점에서 도깨비처럼 생긴 행원과의 작업을 끝마친 뒤, 남자는 먼저 인근 서점을 찾아 달렸다.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뛰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잡지를 읽기 위해서였다. 활자를 좋아하는 그는 현실을 잊을 만한 단어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단어들이 잔뜩 묻어있는 것은 잡지였다. 알수 없는 수식어들과 화려한 광고 사진을 보면 조금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서점에 와서 난감한 일이 생겼다. 그와 같이 잡지 내용만 보고 사지 않는 손님들을 방지하기 위해 서점서 잡지만 특별하게 포장을 했다. 뜯기만 하면 곧바로 15000원이 날아갈 터였다. 예상치 못한 일정이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사야 할까 말까.
결국 남자는 선택했다. 사지 않기로. 그는 영리했다. 잡지가는 수집품이 따위가 되선 안된다는 것을. 대신, 다른 대안책을 찾기로 했다. 영화였다. 그는 영화를 좋아한다. 근데 일반적인 영화는 또 싫어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헐리우드 영화를 싫어한다. 예전엔 상영관이 모두 헐리우드 영화로 가득차게 된 것이 억울해서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올렸던 전적이 있던 그다.
아무튼 그는 인근 영화관을 검색했다. 그리곤 감탄했다. 10분 거리에 예술영화관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가 존경하는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신작이 개봉하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곧바로 계획을 변경했다. 단순하게 잡지 두어권을 읽고 오늘 하루 기분을 잘 정제하려했던 계획에서 철저하게 '감성데이'로 바뀌었다.
그는 10분 동안 걷기 위해, 가까운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했다. 마침 그 영화관이 고궁 인근이었던 터라, 천천히 걸으면서 도시풍경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얼그레이 스콘'까지 구입했다. 영화관 즈음에 도착했을때 출출해질 것을 감안했던 것이다. 그는 영화관으로 가는 길을 치밀하게 구성하기 시작했다. 세 발자국 정도에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자신이 오종 감독의 어떤 작품을 좋아했던지 되뇌이길 시작했다. 오종 감독 특유의 스토리 라인과 멋진 프랑스어가 잘 조합된 미장센은 단연 명품 중의 썅명품이었다.
다행히, 그의 이날 하루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광화문을 즐길수 있었기에 평소보다 괜찮았다고 자평했다. 또한 그는 이날에 겪었던 놀라운 점 하나도 발견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