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제니퍼 가너와 마크 러팔로 주연의 <13 going on 30>. 19살 수능 끝나고 한창 할 일 없던 때, 내 삶의 낙 중 하나는 비디오를 빌려 영화를 보는 거였다. 방과 후 친구들과 우리 집에 모여 영화를 보고, 혼자 남아 다른 영화를 보고. 학교에서 영화 보고, 집에 와서 보고, 자기 전에 다른 걸 보고...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내가 가면 2+1 행사처럼 하나씩 비디오를 얹어서 빌려주곤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13 going on 30>도 그 당시에 본 영화였고 아직까지 꽤 좋아하는, dvd를 흘끗 쳐다만 봐도 마음 한편이 말랑해지는 그런 영화라 하겠다.
모두가 '헐크 아저씨'로 알고 있는 마크 러팔로는 사실 꽤나 사랑꾼이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더 많이 얼굴을 내비쳤던 그가 마블 영화에, 그것도 헐크로 합류한다는 기사를 봤을 땐 놀랍기까지 했다. 연기에 장벽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요즘 세대가 그의 넓고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알지 못한 채 오직 '헐크'로만 알아보는 게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마블에 합류하기 직전 '비긴 어게인'이란 영화를 찍어서 그나마 로맨스도 찍을 수 있는 아저씨 정도로 인식됐다는 거다. (제니퍼 가너는 지금도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녀의 로맨틱 무드에 대해선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13 going on 30>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학교에서 프롬 퀸(prom queen)이 되고 싶었던 여자애가 희대의 악녀가 되었다가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 짧은 플롯 안에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각각의 조악한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데 그 과정이 참 재밌다. 서문에 썼던 대사는 제니퍼 가너가 참회를 하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달을 때 내뱉는 말이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말이라 메모장에도 써 놓고 한때는 싸이월드 대문에도 써 놓은 문구였다.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We need to remember what used to be good.'
나는 종종 옛날 시절을 생각한다. 우표를 좋아하게 된 계기, 겨울을 좋아하게 된 계기 등, 특정 '계기'를 생각하곤 한다. 그러면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 속 아주 먼 기억들이 퍼즐처럼 타다닥 맞춰지며 무언가가 몽글몽글 떠오른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영화광이었던 아빠 때문인 거 같다. '다다다단, 다다다단'하고 kbs 토요명화 오프닝 곡인 '아랑후에스 협주곡'이 흘러나오면 나는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아빠 옆에 누워 영화를 봤다. 내용은 이해 못 할 어린 나이었지만 매주 꼬박꼬박 챙겨 봤던 영화만 해도 몇 십 편은 될 거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터미네이터2, 그리고 여고괴담)
언제부터인지 '과거에 연연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라는 식의 말들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나는 반대올시다. 사람이 과거에 쌓아올린 토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일부 나쁜 기억은 무너뜨릴 수 있다. 이건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좋은 기억까지 무너뜨리면서 '미래'를 위한 새사람이 되어야 할까? 영화 속 대사 그대로 우리는 좋았던 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고, 끄집어내서 기억해야만 한다. 나를 만들었던 과거의 좋고 소중한 기억까지 등지면서 살 필요는 없다는 거다.
나는 너무 젊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살아갈 거고 스스로도 많이 변할 거라는 걸 알지만, 바쁜 시간 속에서 소중했던 것들을 모두 뒤로한 채 앞으로만 돌진하는 경주마가 되고 싶진 않다. 고인 물이 썩는다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지만, '나'라는 유기체의 일부가 된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을 무시하고 앞으로만 가는 사람들도 발전이 없긴 매한가지다. 우리 모두 '나'를 구성하는 취향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소중했던 시절의 향기를 맡아보는 여유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