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나마나

언어의 온도

by 고로케

핑크색 요를 깔고 바닥에 누웠다. 푹신했다. 내 방엔 침대가 없다. 침대 대신 책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일에는 침대가 있는 오빠 방에서 잠을 자고, 오빠가 오는 주말이면 내 방에 요를 깔고 눕는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씨디 꽂이 옆에 정리되지 않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도 모를 책들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누워서 쳐다보다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발견했다. 분명 2017년 초에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잠시 일어나 앉아 책을 열어봤다. 글자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지하철에서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어 가방에 넣었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세월과 습기 때문에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언어의 온도>는 내게 특별했다. 그와 내가 참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먼 곳으로 출장을 간다던, 장거리 비행이라 너무 지루할 거 같다고 푸념하던 그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좋아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억지도 손에 쥐여줬다. 그는 에세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으니까.


"언어에도 온도가 있을까요? 신기하네요. 베스트셀러네요? 책 잘 읽을게요."


고맙다는 문자가 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4살은 많았음에도 늘 경어를 사용했다. 언어에 온도가 있는지 몰랐다는 투로 말하는 그는 다소 다혈질이긴 했지만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따뜻한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뜨거운 말은 아니었다. 적당하게 미지근한, 말 그대로 온수처럼 '따뜻한 말'이었다.


그는 곧장 선물에 대한 보답의 의미로 회사로 책을 보내줬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아니, 정의였나. 굉장히 오래된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니 한글과 한문이 빼곡했다. 서문조차 읽기 싫었다. 그가 출장에서 오기 전까지 나는 이 책을 다 읽어야 할 텐데, 먹기 싫은 음식을 먹듯 꾸역꾸역 읽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쯤이었다. 나는 우리가 물과 기름처럼 섞이려야 섞일 수 없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팬시 차일드나 비와이의 음악을 들을 때 그는 클래식을 들었다. 내가 블랙호크다운(Black Hawk Down)과 퓨리(Fury)를 인생 영화로 꼽을 때 그는 남아공 소년들이 빈민촌에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독립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았다. 내가 커머셜 콘텐츠에 대해 고민할 때 그는 계몽 콘텐츠에 대해 고민했다. 내가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에 대해 논쟁할 때 그는 정권에 대해 논쟁했다. 내가 축구에 열광할 때 그는 축구를 보지도,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사람들처럼, 서로가 고개를 돌려 옆으로는 볼 수 있지만 평생을 달려도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점차 들었다.


<언어의 온도>를 선물한 이후, 그리고 그에게서 민주주의의 시발점인지, 아니면 정의의 시초에 관한 기억나지 않은 책을 선물 받은 이후로 우리는 평행선의 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이 관계가 나를 무겁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음이 반가웠다. 더 이상 나는 클래식에, 민주주의에, 계몽주의에 깨어있는 사람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그를 못 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나 올해 우연히 한 식당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됐다. '건강해 보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라고 시작한 그의 말 한마디는 여전히 따뜻했다. 본인은 느끼지 못할지라도. 순간 나는 당황하기보단 '아, 그래요. 당신은 참 따뜻한 언어의 온도를 가진 사람이었죠.'라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하철에서 눅눅해진 책장을 넘기다 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났다. 아마 책 속의 글자들이 머릿속을 파고들다 숨겨진 기억 서랍을 건드린 거 같다. 책을 선물했던 그때도, 그리고 내 언어도 누군가에겐 참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아주 뜨겁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번 읽는 책은 흔치 않지만 오랜만에 읽는 책이 추억과 함께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도 서점에서나, 지하철에서나 이 책을 마주칠 때마다 회색빛으로 바랬을 법한 나와의 추억을 한 번쯤은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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