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휴가를 냈다. 광고 업무 특성상 미리 일을 쳐 낼 수는 없어서 2주 연속으로 야근을 해도 당일 업무 분량을 쳐 내는 것뿐이지 휴가를 위해 뭔가 준비하는 건 아니었다. 일주일 휴가를 낸다고 하니 남들은 유럽을 가냐, 미국을 가냐, 팬시한 곳으로 가냐 여러 궁금증을 토해내듯 물어봤지만 나는 그저 '섬에 가요'라는 한 마디만을 남기고 떠났다.
맞는 말이었다. 몇 주전 안락의자에 앉아 티비를 켰을 때, 유해진과 차승원이 나오는 '삼시세끼-어촌편'이 나오고 있었고 거북손과 우럭 한 마리에 낄낄거리는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담백하고 좋아 보이던지. 새벽 배를 타고 루돌프처럼 빨갛게 물든 코를 훌쩍이며 외딴곳에서 홍합을 캐는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그 환상적인 모습에 빠져 한 시간을 넘겨 티비를 끝까지 다 봤던 기억이 있다.
작년에도 이 맘쯤 일주일 휴가를 냈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스스로 'think week'를 설정하고 지난날을 뒤돌아보고 앞으로를 생각해보자는 의미였다. 무엇보다 일주일 정도 푹 쉬고 나면 어딘가에 꼭꼭 숨겨놓았던 감사함이 고개를 들고일어난다. 11월 중순~말이면 항상 북풍이 불던 내 마음에 고작 일주일의 휴가는 서풍이 불도록 만들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이번에도 비슷한 시기에 휴가를 냈다.
비가 오고 날이 무척 추워졌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두부와 산책 중이었다. 두부는 첫째라 그런지 제법 의젓하게 산책을 즐긴다. 덕분에 나는 두부와 산책 중에 이런저런 사색에 잠기곤 한다. 그날은 무슨 날이었을까. 지난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학시절 과외했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다 각각 제 모양으로 구실을 하며 살아가고 있겠지,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초등학생 원희였다.
말 귀도 못 알아듣는 초등학생은 절대 가르치지 않는다고 세 번 정도 퇴짜를 놓았지만 엄마의 간곡한 부탁으로 몇 달 정도만 해보겠다 했던 과외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제일 기억에 남는 아이였다. 초등학생이라 그런지 순수하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폭죽처럼 터져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도 들었다.
"원희도 스트레스를 받아? 스트레스 받으면 뭐해?"
"선생님, 저는요. 스트레스는 뇌에 고이는 까만 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기 전에 눈을 감고 까만 물을 국자로 퍼내는 상상을 해요. 그럼 까만 물이 사라지니까 속이 시원해요."
원희 과외는 내가 인턴에 합격하면서 관두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저 대화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 맴돈다. '스트레스는 뇌에 고이는 까만 물, 국자로 퍼내면 마음도 산뜻'.
"고로케, 나는 조만간 담배를 피울 것 같아요. 스트레스가 심해서 업무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면서 해소하는 게 낫겠어."
"오, 저도 같은 생각을 했는데."
물론 나는 담배는 물어본 적도 없는 비흡연자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 종종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담배'. 흡연자에게 담배가 어떤 의미를 가진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나눈 나와 내 동료는 적어도 담배는 '뇌에 고인 까만 물을 빼내는 배출구'의 역할을 가진 물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여하튼 저 대화 이후 묘한 버릇이 생겼다. 스트레스가 극에 치달을 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에 끼인 매연이 조금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다 원희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자기 전 두 눈을 감고 까만 국물을 퍼내는 원희와 가끔 담배를 피우는 나를 생각하는 나. 까만 국물을 버리기에 바쁜 두 여자.
내 머리와 마음에 까만 국물이 생기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그게 어디 쉬우랴. 예전에는 원희의 말을 듣고 국자로 머리에서 국물을 퍼내는 상상을 하려 노력했지만 나는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순수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무리 상상해도 머릿속에 국자가 등장하지 않았다. 마음속 까만 국물을 다들 어떤 방법으로 퍼내는지, 요즘 그 방법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