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방 정리를 했다. 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고 그동안 맞춘 레고를 장식할 공간을 만들려 겸사겸사 치우기 시작했다. 2018년 이사를 오고 별로 손대지 않았던 공간인데 2년 만에 변화를 주려 하니 막막했다. 한 번에 우르르 쏟아내고 치우기보다는 구역을 나눠 치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장식품이 들어갈 공간과 책이 쌓여있는 큰 책장만 치우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좋은 전략이다.
겹겹이 쌓여있는 책을 들어내면 벌레가 나오는 거 아닌가 내심 쫄았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산속에 있는 집이라 바람이 불면 흙도 날아와서 그런지 흙먼지가 있었지만 벌레는 없었다. 2018 대한민국 트렌드부터 언제 샀나, 도대체 왜 산 건지 의문이 드는 책도 있었다. 늘 그렇듯 버리는 책들은 한곳에 쌓아두고 알라딘 중고서점 바코드를 하나하나 찍기 시작했다. 값어치가 되는 책부터 안되는 책까지 책들의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책꽂이 속에 편지들이 많았다. 편지와 일기장을 보관해 두는 공간은 따로 있는데 귀찮아서 책꽂이에 다 쑤셔 넣었던 것 같다. '으음' 짧게 고민하다 모두 제자리에 보관하기로 결심했다. 먼지 쌓긴 편지 박스의 먼지를 물걸레로 슥슥 닦아내고 편지를 정리했다. 하나씩 읽기 시작하면 감상에 젖을까 봐 편지는 다시 열어보지 않았다. 대신 일기 박스의 뚜껑을 열어 손에 집히는 일기장 몇 개를 살펴봤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대충 눈에 띄는 대로 손에 쥔 일기는 21살의 일기였고 풋내음에 마음이 간지러워서 금세 덮었다. 그리고 2017년, 2019년에 작성한 '연말정산'이라는 워크북을 일기박스에 넣고 봉인했다. 무쓸모임 글에도 있지만 2019년 연말정산은 오랜 친구와 함께 강릉에서 작성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쭉쭉 읽어가다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했는데, 그 구절이 꽤 오랜 시간 눈에 밟혔다.
'멀어질 때는 이야기하고 멀어져 달라고'
예고 없음과 있음은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이별 앞에서도 '예고 있음'과 '없음'은 사람 마음가짐조차 다르게 한다. 최근 내 주변엔 이전과 달리 '저 사람이 원래 저랬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변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그동안 잘못 봐왔을 수도 있고,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 태도가 180도로 변한다는 건 하나의 시그널일 수도 있다. 내가 너와 멀어지고 싶다는 '예고 있음'의 한 종류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사람의 변한 태도를 보고 거리를 두는 나 자신이 당신에게 예고를 보내는 걸 수도 있다.
불행도, 행복도, 슬픔도, 아픔도, 모두 예고 없음 아닌가. 모두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당황하고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리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세상 사는 게, 삶이라는 게 재밌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않겠다. 예측불가가 재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나는 '예고 있음'이 좋다. 다가오는 사랑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 예고 있음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