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한다는 것. 정정하자면 최소한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건 하나의 성의라고 생각했다. 성의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존중이라고 생각했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타고날 때부터 기억력이 좋은 사람, 혹은 기억이나 추억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고, 감사하게도 나는 전자에 속했다. 게다가 일기도 쓰기 때문에 웬만큼 사소한 것도 모두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나는 요즘 들어 묘한 감정의 딜레마에 빠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소한 것을 기억하는 것=세심함=성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서부터였다. 누군가 말하기를, 내 기억에 의하면 꽤 오랜 시간 이런 말을 들어왔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상황을 보고 그 부분을 기억하고 챙기는 건 매우 성의 있고 배려심 있는 행동이라 했다. 그리고 33년을 '기억=세심=성의'라는 공식에 얽혀 살다 보니 이제는 가벼운 기억력을 가진 사람에게 실망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애가 있는데, 친한 앤데, 내가 우리 엄마 입원했다고 한 다섯 번은 말했는데 오늘 또 딴소리하는데, 내 말을 개무시하는거야?"
"개무시가 아냐. 그런 애들은 100번 말해도 기억 못 해. 걔는 그냥 어떤 상황이나 현상만 기억할 수 있는 애야"
친하게 지내는 회사 동료가 나에게 뚱딴지같은 질문을 던졌고, 나는 '우리 엄마 입원 중이라 못 간다'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하면서 아주 솔직히 말하면 상대방에 질린 상태였다. 내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걸 왜 기억하지 못하나, 나를 개무시하는 건가, 이건 완전 성의의 문제가 아닌가 싶었을 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사람들은 상황이나 현상만 기억할 수 있다고.
실제로 그 아이는 우리 엄마가 다쳤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했지만 입원을 했는지, 통원치료를 하는지는 열 번을 말해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 상황만 기억하는 거' 이거 좀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상대방이 세심하게 기억하던 말던, 배려심이 있든 말든, 그냥 상황만 기억하는 거다. '네가 다쳤다, 수술을 하든 말든 몰라, 여하튼 너는 다쳤다. 그러니 위로해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이 흘러간다면 어쨌든 적잖이 심심한 위로는 건넬 수 있고, 쓸데없이 사소한 것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나는 요즘 많은 것에 지쳤는데 코로나 블루 때문인지, 되는 일도 없고 재미도 없는 그저 그런 요즘의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기억하는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실천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로 너무 많은 것들이 마치 영혼이 터널을 지나가듯 후루룩 지나가서 가끔은 머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도 받고, 최근의 기억이 없어서 인지 아주 오래된 낡은 것들만 기억하기도 한다.
'와, 대리님은 정말 세심하네요. 섬세하네요. 이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와, 그런가? 내가 그렇게 섬세한가? 하하하' 갸갸호호 웃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안 하게 된 내가 밉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주 밉고 보기도 싫다. 요즘은 누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은 헤 벌렸지만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 않겠지. 여하튼 '제가요?'라고 되묻기에 바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엮이고 싶지도 않고 그냥 그렇다. 내 머리는 햄릿이 손가락을 넣어 부여잡던 두개골처럼 텅 비었다. 바람이 슝슝 왔다 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