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쓰나마나

몇 개의 감정

by 고로케

나는 겁이 많은 편이라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는다. 건강상의 이유로 술마저 마시지 않으니 더더욱 밤에 돌아다닐 일이 적어졌고, 일 때문에 야근하거나 모임을 하지 않는 이상 자정 무렵까지 길거리를 헤맬 일은 아예 없어졌다. 그런데 이런 루틴을 무시하고, 요즘은 밤늦게 편의점이나 동네 주변을 종종 돌아다니곤 하는데, 그날도 나는 별 생각 없이 편의점에서 맥콜을 하나 집어 나왔고 의자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건너편에는 작은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은 문을 닫는 분위기였고 사람도 없었다. 아니,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25살 언저리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이 있었는데 라면이 식길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누굴 기다리는 건지 앞만 보고 앉아있었다. 나는 이미 맥콜을 다 마셨지만, 그냥 그 남자애를 무심코 쳐다봤는데 내 입에 침이 흐를 정도로 라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안쓰럽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실례일지도 모르겠다. 남자는 소주도 시켜서 라면과 같이 마셨는데, 분명 몇 젓가락 먹지도 않더니 밥을 시켜 말아먹었고 뭐가 그리 급한지, 아니면 배가 무척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반팔티를 입고도 땀을 연신 닦아내는 모습과 술도 라면도 밥도 모두 쫓기듯이 먹는 모습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갔다.


씻는 도중 생각해보니 살면서 누군가를 보고 '안쓰럽다'고 생각한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안쓰럽다는 감정은 슬픈 감정도 아니고 마음이 아픈 감정도 아닌 것 같고. 말로 표현하자니 무척 어렵지만, 그 당시 나는 어린,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무엇이 그리 고달프고 바빠 그 늦은 시간에 라면을 허겁지겁, 밥을 허겁지겁, 술도 허겁지겁 쫓기듯 홀로 먹고 마셨을지. 앞으로 평생 알 수 없는 그의 그 날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쓰나미처럼 쏠린 감정에 씁쓸했고 안쓰러웠고 이름도 모를 애가 이것저것 먹고 마셔 부른 배를 퉁퉁거리며 행복하게 집에 가길 바랬다.


생각해보니 한국어에는 감정을 표현하는 무수한 단어들이 있지 않나.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도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미워하고, 증오하고, 부러워하고, 슬퍼하고, 격노하고, 안쓰러워하고, 경이로워하고 등등 아직 내가 겪지 못한 감정도 별처럼 많지 않겠냐는 생각에 갑자기 가슴이 설렜다. 이 설렘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의 요동이라 더욱 특별했다. 코로나 때문인지 33살이지만 가진 게 없어 그런지, 우울이라는 덫에 걸렸던 발 하나가 덫을 뚫고 나온 느낌이었다.


'안쓰럽다'는 감정이 준 그 생경함을 느끼고 앞으로 더 많은 감정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들이 많을 텐데, 예를 들면 나는 단 한 번도 '경이롭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어떤 걸 보고 경험하고 느끼면 '경이로움'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이 문득 궁금해지는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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