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다크투어리즘 - !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여행지 제주도! 여름휴가를 앞두고 제주여행 계획을 세우시는 분들 많으실텐데요~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고르라에서는 다음블로그에서 '광제' 로 활동하고 있는 양경만 작가와 함께 제주 4.3 여행코스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랑쉬 오름, 광치기해변 등 많은 여행자들이 알고 있는 아름다운 관광 명소들 속에 숨겨진 가슴 아픈 이야기. '양경만의 4.3 읽어주는 남자' 참고하셔서 뜻깊은 여행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지금은 하루 수만, 일 년에 수천만의 관광객들과 제주도민들이 육지를 오가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고 제주의 풍광과 평화로운 모습만을 바라보며 부품 꿈에 발을 딛지만, 그 발을 딛는 땅 아래에 수백 명의 원혼들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정뜨르 비행장은 현 제주국제공항의 옛 이름이다. 태평양 전쟁말기에 일제가 만든 육군비행장이다. 여기에서 ‘뜨르’는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로서 아래쪽에 있으면 ‘알뜨르’ 위쪽에 있으면 ‘웃뜨르’라고 불렀는데, 당시 만들어진 일제 육군비행장을 사람들은 ‘정뜨르’라고 불렀다.
정뜨르 비행장은 1949년 군법회의와 1950년 예비검속에 걸려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암매장된 곳이다. 최근까지도 제주공항 남북활주로변에서 당시 희생자들이 한데 뒤엉키고 두 손이 뒤로 묶여 있는 채로 총살된 유해들이 발굴되기도 하였고 올해 본격적으로 유해발굴이 진행될 예정이다. 진실이 밝혀지고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포고령과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고 난 뒤 현재까지 복구되지 않고 버려진 중산간 마을은 2005년까지 조사된 것만 108곳이다. 이 중에는 오라동의 어우늘 마을도 포함이 되는데, 4.3이 발발하고 얼마 있지 않은 4월28일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과 9연대장 김익렬과의 평화협상을 깨고자 미군정에서 방해공작으로 불을 지르고 사라지게 만든 마을이기도 하다.
현재의 오라동(吾羅同)은 모오·사평·연미·정실·월구·공설·동성 등 7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설촌 연대는 마을마다 다르고 문헌상에 기록돼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모오(牟梧)마을은 '농토가 비옥해 보리농사 잘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사평(沙坪)마을은 '모래가 많은 평평한 들'에서 마을지명이 유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4.3때 불에 타 사라진 '어우늘' '해산이' '고지레' 마을은 복구되지 못하고 잃어버린 마을로 역사 속에만 남아 있다. 그 유명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함께 진행된 군경의 토벌작전으로 연미마을, 정실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는데, 다른 마을은 현재 인구 밀집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어우늘 등 잃어버린 마을에는 쓸쓸하게 표석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4,117명의 제주4.3 희생자의 위패와 행방을 알 수 없는 3,895기의비석이 모셔져 있는 추모공원이다. 10만여 평의 공간에 평화기념관을 비롯하여 위령재단, 위패봉안실, 추모광장, 봉안관, 초대광장 등이 들어서 있고 누구나 언제든지 이곳에 들러 4.3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는 동시에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기념공원이면서도 이제는 제주도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아픈 역사를 있고 있는 곳이지만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만들어지고 2008년 3월 28일 개관하게 된 제주4.3평화공원, 눈이 있어도 보질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지난날의 아픈 역사, 이곳에 방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주4.3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쪽지들이 참배 공간에 가득하다. 널리 알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근처에 있는 돌문화공원은 제주 섬을 창조한 여신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돌에 관한 전설을 테마로 한 공간이다. 이곳은 작년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방문하기도 했으며, 공원 내의 제주전통초가 공간에는 4.3 으로 사라진 중산간 마을의 전통초가 13구가 재현되어 있다.
와흘리는 조천읍에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와흘리를 비롯하여 대흘리, 선흘리 등 이름도 독특한 마을들이 조천읍의 웃뜨르에 집중된다. 제주도에 있는 모든 중산간 마을이 제주4.3의 고초를 피해가지 못했듯이 이곳 와흘리 인근 또한 그 당시의 격랑 속에 함께 했었다. 와흘리의 4.3 유적은 넓은 못 옆에 있는 위령탑에서부터 시작된다.
중산간 마을 소개령이 한창이던 1948년 11월 11일, 조천지서를 습격한 뒤 퇴각하는 토벌대를 쫓아 와흘리까지 오게 되고 결국은 이 마을에 불을 지르게 된다. 재빠르게 와흘굴 등으로 피신하여 주민들의 피해는 없었지만, 재차 13일에 진압군이 마을을 찾았을 때는 미처 피신하지 못한 노약자들이 상당수 죽임을 당했다.
와흘굴에 숨어 지내면서 죽임을 모면했던 주민들은 이후 소개령에 따라 해안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이들 중 150여명은 마을의 박성내로 끌려가 무고하게 희생을 당하게 된다.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희생된 150여명의 명단은 지금도 넓은 못 위령탑에 또렷하게 남아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제주시내 사라봉 옆에 있는 별도봉은 유난히 제주의 아픔과 고초를 많이 겪은 곳이다. 일제가 무고한 민초들을 동원하여 파놓은 진지동굴들이 무려 열 곳에 이른다. 제주지역을 요새화하기 위해 파놓은 것이다. 기슭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곤을동 마을 터다. 제주4.3 당시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이름이 붙여진 곤을동 마을은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까닭에 어업 또한 생계를 이어가는 주요 수단이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이 마을에 토벌대가 들이닥친 것은 1949년 1월 4일이었다.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한창이던 때다. 어떻게 해안에 있는 마을이 초토화 대상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시에 들어 닥친 토벌대에 의해 43호였던 가옥이 모두 물에 타고 24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지금도 곤을동 마을 터에 가면 골목길과 돌담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평화롭던 마을의 연상케 하고 있으며, 마을의 입구에는 ‘잃어버린 마을’이라는 표석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당시 저질렀던 무법적이고 끔찍한 학살의 현장들은 제주도 곳곳에서 그때의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유해들이 끝없이 발굴되고 있는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을 비롯하여 수많은 유적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왜 이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고 70년이 지나도록 왜 진상규명이 안 되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필자는 제주4.3의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적지들을 돌아보며,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으로 삼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