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고양이상자 Mar 29. 2018

내가 기억하는 엄마

임신부터 출산까지 (2016.12.31. 작성)

| 일반적이지 않은 모녀


내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던, 아니, 결혼 자체를 하려 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엄마의 역할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역할이 뭘까? 집밥을 해주는 사람? 생활의 불편함이 없게 보살펴 주는 사람?


게다가 “엄마를 보면 그 딸을 안다.”, “여자는 엄마를 닮는다.” 등등..... 생각과 배려 없이 쉽게 내뱉는 사람들의 말도 한 몫했다.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더 열심히 산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말이 사실일까 봐 두려웠다.


딸은 엄마와 많이 싸우기도 하지만 친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친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혼난 적은 많지만 애정을 바탕으로 싸운 적도 없었다. 엄마는 초등학생 때 몇 번을 제외하고 내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들한테 기죽기 싫어서 엄마가 싸준 것처럼 보이려고 도시락을 열심히 싼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점심시간에는 도시락 반찬 투정을 하면서 엄마와 싸운 얘기를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듣기 싫어서 그냥 잠만 자기도 했다. 가족들이 숨죽여 지낸다는 고3 때조차 보살핌은 커녕,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다. 엄마가 딸밖에 없다며 나를 안아줄 때는, 아빠나 오빠에게 실망하거나 화났을 때뿐이었다.


20대 초반에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에게 같이 살자는 연락이 왔었다. 나는 보통 드라마에서 나오는 모녀 상봉을 기대하고, 청소년기에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아 미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내가 원했던 건, 그 한 마디였다. 그러나 왜 미안하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같이 살지 않기로 했고 그때부터 결혼 전까지 혼자 살아왔다.



|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여성


엄마는 화려한 패션리더였다.

초등학생 때는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이 싫었다. 챙이 큰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꽃무늬가 인쇄된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엄마를 보고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게 싫었다. 지금 여성들이 당연하게 입는 레깅스를 그 당시 어린 나에게 신겼을 정도였다. 그게 트라우마가 됐는지 나는 외모를 꾸미지 않는다. 언젠가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내게, 한창 예쁜 나이에 꾸미고 다니지 않는다고 뭐라 한 적이 있다. 본인 때문에 싫어하게 됐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혹시 우리 아가가 딸이라면 내 모습이 싫어서 꾸미는 것을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얼리어답터였다.

우리 집에는 신기한 물건이 많았다. 야채나 과일을 말리는 기계, 쥬서기, 우유를 데우는 기구, 건조기 등이 있었다. 아빠의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여서 그 모든 것을 구비할 수 있는 환경이 됐던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기 힘들었던 물건이 많았고, 말린 바나나 등 간식거리가 많아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신기해했다.


엄마는 예술가였다.

엄마 아빠 모두 예술적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는 글씨를 잘 썼고 술을 좋아했다. 엄마는 노래를 잘했고 손재주가 좋았다. 집 여기저기에는 엄마가 만든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내가 그 끼를 물려받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힘들었던 점도 있었다. 아빠의 사업이 하향세라서 집에서 지원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상황을 모르는 선생님들은 가창 시험 후에는 노래를 전공해보라, 사생대회에서 상을 탄 후에는 그림 전공해보라 등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관심 없다며 안 할 것이라고 무덤덤하게 답변했지만,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엄마는 며느리 역할을 거부했다.

아빠 본가는 남존여비가 심한 곳이었다. 여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서 차린 음식을, 가만히 앉아 있던 남자들이 먹고 나면, 남은 반찬에 여자들이 먹고 나서 치우는 그런 곳.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나는 아빠 무릎에 앉아 아빠랑 같이 먹었으니까. 하지만 초등학생인 나에게 "아가씨"라 부르는 20대의 새언니가 생기면서 나한테 존대해주는 언니가 좋으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엄마가 언제부터 아빠 본가에 가지 않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사촌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 부러웠던 기억만 있다.  



|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여성으로서 엄마가 이해되고 안타까운 점도 있다. 아빠는 아빠로서 너무 좋은 분이었지만 남편으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을 테고, 엄마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당당하고 멋지게 살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인 그녀는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고 딸이 아들을 보조하길 바랐다. 자신은 부당하다 여겨지는 여성의 역할을 거부했으면서 말이다. 엄마는 오빠 도시락을 싸라고 초등학생인 나를 깨운 적도 있었고, 오빠가 좋아하는 음식만 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내가 학급 임원이 돼도 축하는커녕, 학급에 이런저런 일로 불려 가기 싫으니 그런 건 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딸은 시집보내면 그만이라 아들만큼 잘해줄 필요가 없다는 말도 자주 했다.


아직도 생생한 한 가지 기억이 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내게, 생일잔치를 언제 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는 생일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엄마는 전업 주부였지만 내 생일상을 차려주진 않을 테니 그냥 지나가고 싶었는데(엄마는 나를 낳아서 고생한 것은 자신이고, 생일은 엄마에게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며 축하해주지 않았다.) 당시 학급 임원이기도 했고 친구들한테 초대받았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 몇 명을 초대하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알량한 자존심이 결국은 나를 피곤하게 한다.


그날 친구들 집에서 봤던 생일상 기억을 되살려 떡, 과자, 음료수 등을 사고, 깔끔하게 보이겠다며 상에 깔 전지도 샀다. 집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오빠가 왔다. 그리고 내 친구를 때렸다. 그 당시 남자 어린이에게 프로레슬링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악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고, 당연히 내 생일은 엉망진창이 됐다. 나중에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오빠가 혼날지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이 일을 벌였다며 내가 혼났다. 이런 기억이 너무 많다.


내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봤다. 일기장을 열기까지 힘들었고,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속상했지만, 사실 확인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읽었다. 읽으면서 다시 생각나는 그때 그 순간들. 억울하다며 울면서 일기를 썼던 내가 너무 불쌍했고, 한편으로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느껴져서 안쓰러웠다. 물론, 엄마의 입장도 있을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잘못한 일도 많을 것이고, 엄마가 내게 잘해준 일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손길을 간절하게 원했던 일기장 속 그 아이를 위로해주고 싶을 뿐이다.


▲  (좌)초등 고학년 때, (우상중)중학생 때, (우하)초등 저학년 때의 일기장 갈무리. 결혼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고, 괜찮은 엄마만 되면 될텐데... ⓒ고상(고양이상자)



| 부모의 유형


Baumrind(1991)는 애정의 깊이와 통제의 강도를 기준으로 부모 유형을 4가지로 나눴다. 우리 부모님은 허용적, 방임적, 독재적 유형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 가장 큰 비중은 방임적 유형. 방임적 유형의 자녀는, 부모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의존적인 사람이 되거나, 부모의 관심을 포기하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나는 후자였다.


▲  자녀에게 올바른 기준을 제시할 수 있고, 자녀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면서 의견을 존중하는, 민주적(권위적)인 부모가 되고 싶다. ⓒ고상(고양이상자)


물론, 부모의 유형을 이 4가지로만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부모 유형대로 자녀가 성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자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서 참고하면 된다. 자신의 부모가 민주적(권위적)이지 않다고 해서 꼭 자존감이 낮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며 자포자기하지 말고,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부모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 좋겠다.



| 아들과 딸을 동등하게 대했다면


결혼하기로 결정한 후, 엄마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다. 그래도 결혼한다는 소식은 전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일까, 나이 들어 기운 없는 엄마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의 마지막 문자는 그 마음을 사라지게 했고, 그다음부터 연락하지 않았다.


"너는 자리 잡았으니, 부족한 오빠 챙겨."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그저 아들은 챙김을 받아야 하는 대상, 딸은 그를 챙겨야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거지. 진짜 부족했다면 내가 알아서 챙겼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유난히 아들병 걸린 엄마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아들병 걸린 엄마란, "딸보다 아들이 우선이면서 힘들 때만 딸을 찾는 엄마"다. 그들에게 딸은, 자신이 힘들 때 푸념을 들어줄 감정의 쓰레기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딸이 어렸을 때는 아들 챙기느라 딸은 관심 밖이었으면서 나이 들수록 딸에게 원하는 게 많아지는 사람들. 아들은 남자라 못하니 딸이 해야 한다는 사람들. 딸의 역할은 아들을 비롯한 가족의 뒷바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느 딸은 자신이 번 돈이 남자 형제 사업비로 고스란히 들어가고 계속 요구하는 것이 많자 가족과 의절하기도 하고, 또 다른 딸은 결혼하고 싶었지만 남자 형제 뒷바라지를 해야 하니 아직 결혼하지 말라는 엄마 말에 서운해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 혜택을 받았던 아들은 엄마나 여자 형제에게 고마워할까? 아니, 아마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아들을 욕할 것 없다. 아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엄마다. 혹자는 무슨 6,70년대 얘기냐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본 적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 착한 딸이 분명 있다. 굳이 말하지 않을 뿐. 말해봤자 "그래도 엄만데, 그래도 가족인데"라는 말이 돌아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엄마가 아들과 딸을 조금이라도 동등하게 대했다면, 우리의 관계는 이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착한 딸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내가 더 나빠 보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우리 아가에게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겠지?

이전 05화 딸은 분홍색, 아들은 하늘색?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귀여우니까 견딘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