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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상자 Mar 16. 2022

Z세대와 살아가기

| 아직은 꼰대가 아닌 듯

(이러면 꼰대라지만ㅋㅋㅋ)


몇 년 전에 기회가 생겨서 좋은 사람들과 간단한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텔레그램 방을 만들어 소통하다가 작업이 마무리될 즈음, 처음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했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나였고, 나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과 내 나이의 차는 무려 띠동갑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만 20대가 아니었다.


나이를 공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년배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오프라인 모임 이후에 모두 불편해할 것 같아서 빠질까 했지만, 그동안 들인 시간과 작업물이 아까워 뻔뻔하게(?) 마무리까지 함께 했다. 감사하게도 그들이 껴준 거다. 더 감사한 건, 나중에 다른 일도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다는 거다. "~님"이라 칭하며 온라인으로 작업할 때는 못 느꼈지만, 막상 그렇게 마주하고 나니 함께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기분 좋은 순간으로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들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말 놓으면서 가르치려는 부류’와 ‘20대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꾸미고 행동하는 부류’로 나뉜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며 이번 작업에서는 말을 놓아도 된다고 허락(?)해줬다. 평소에 '젊어 보이는 것'과 '젊어 보이려 애쓰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전자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으나, 후자는 '부담스러움'의 대상이라서.


물론, 나는 그다음에도 말을 놓친 못했다. 말을 잘 놓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존댓말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어린이에게도 존대한다. 그래서 강의도 존댓말로 하고 학생들도 그렇게 대하고 있어서,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는 강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어느 학생이 자신의 40대가 나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길래, 그러지 말라며 학생의 미래는 더더더 멋질 거라며 응원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되돌아보면, 오히려 대학생 때 꼰대였던 것 같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는 학번으로 선후배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재수나 삼수를 한 동기나 후배에게도 말을 놓았다. 후배들은 야자타임 등의 게임을 할 때 “ㅇㅇ야!!”라며 선배 이름을 외쳤다. 좀 친해지면서 말을 놓는 후배가 많아졌지만, 호칭은 선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입생 중에 재수나 삼수를 한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동기끼리 언니(누나), 오빠(형)로 부르며 관계가 형성된 반면, 선후배 관계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족보가 꼬였달까. 동기 사이에서는 상관없지만 전체로 봤을 때는 선후배 관계가 이어지지 않아서 조직(과, 동아리 등) 자체가 와해된 경우도 생겼다. 그냥 선배라고 호칭만 하고 편하게 지내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되더라.


내가 신입생일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동기가 내게 “나 재수했어. 언니라고 불렀으면 좋겠어.”라고 하길래 “우리 같은 학번이잖아.”라고 했었다. 그때는 선배들도 그런 정리(?)를 권장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 동기와는 졸업할 때까지 친해지지 못했다. 그 동기는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동기들과 친하게 지냈고 나는 다른 동기들과 친하게 지냈다. 재미있는 건, 그 동기는 한 학번 선배들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았다는 거다. 자신은 선배 대접을 하지 않으면서 언니 대접은 받으려는 게 별로여서 언니라고 부르기가 더 싫기도 했다. 게다가 출생한 월로 따지면 나와 그 동기는 2~3개월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나라에서 나이는 정말 중요한 요소다. 서로 모르던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너 몇 살이야?”일 정도니까. 우리나라 나이, 만 나이 이런 거 다 통일되면 좋겠다. 자기 생일 지나면 한 살 더 먹는 게 제일 효율적인 것 같다. 해가 바뀌면 다 같이 한 살 먹는 건 너무 이상하다. 12월생인 아가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 해가 바뀌어 1월이 되면 두 살이 된다. 2개월 살았는데 두 살이 되는 희한한 나이 계산법.



| 가르치며 배우며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면서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세대가 다르다는 걸 느낀다. 시험에서 성별 표기 서식을 만드는 문제를 출제한 적이 있다. 강의할 때에는 ‘요즘 성 소수자 문제도 있기 때문에 성별 표기란을 비워두고 자유롭게 작성하게 하거나, [①남 ②여 ③기타(밝히고 싶지 않음)]등으로 서식을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채점을 하면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학생의 50% 정도가 [①여 ②남 ③기타(밝히고 싶지 않음)]이라고 답안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초등학교에서 남학생부터 번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민등록번호의 뒤 첫자리(성별 구분용)를 새로 지정할 때 그동안 [1이 남자, 2가 여자]였으니, [3은 여자, 4는 남자]로 지정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서식의 남녀 순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의 답안을 보면서 선례가 있는지 찾아본 후, 다음 강의부터는 선배들이 이렇게 답안을 쓴 것을 보여주면서 나중에 바뀌는 곳도 있을 수 있겠다고 말해주려고 한다. 표면상 내가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들에게 많이 배운다. 일방적으로 누군가는 가르치고, 누군가는 배우는 시대가 지난 지 오래다. ‘교수’, ‘강사’, ‘교사’ 등의 단어도 바뀌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미 사교육 쪽에서는 ‘코치’, ‘튜터’ 등을 활용하고 있는데 외래어보다는 적당한 우리말이 있으면 좋겠다.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코로나 상황이 좋아졌을 때 전체 대면 강의만 몇 주 이어서 한 적이 있다. 비대면과 대면 강의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강의실에 왔던 대여섯 명의 학생과 만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다시 상황이 안 좋아져서 계속 만나지는 못했지만, 캠퍼스에 학생들이 있으니 역시 활기차고 좋았다.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면서 가르치며 배우며 나이 들고 싶다.


나는 사람 얼굴을 잘 못 외우는 편이다. 관심 없는 건 아닌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 학생들의 이름은 다 익숙해졌는데 얼굴과 매칭이 되지 않아 어렵다. 오며 가며 반갑게 인사하는 학생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면 미안할 따름이다. 출석을 부르면서 일부는 인식했는데 그게 너무 일부다. 내 머릿속 용량이 그 정도인가 보다. 학기초부터 익숙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아쉽다.



취업


취업에 대한 고민이 많은 학생들은 가끔 내게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해준다. 어딘가에 탈락했다고 자신을 탓하지 말라고. 그저 그곳과 인연이 아니었던 것이지, 자신과 맞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내 사례를 덧붙이곤 한다.


20대에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유명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곳에서 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곳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면서 공고문을 확인했다. 취업 사이트에 구인공고를 내는 곳이 많지만, 해당 기관은 그런 곳에 공고를 올리지 않고 기관 홈페이지에만 올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지원했을 때는 탈락했는데 두 번째 지원했을 때 붙었다. 지원서를 비교해봐도 스펙이 확 추가된 것이 아니어서 신기하면서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몇 년이 지난 후, 부서장 중에서 나의 첫 지원서를 기억하는 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첫 지원서에 뭔가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두 번째 지원했을 때 그 부분이 채워져서 채용 결정이 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어떤 문서든 성실하고 일관되게 작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요즘 세대는 비혼 주의자가 많다. 아마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나도 결혼 생각은 없었지만, 아이는 가지고 싶었다. 정자은행과 난자은행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주변 시선을 견딜 용기도 없었고 일을 쉴 수도 없었으며 돈도 없었다. 그래서 얼마 전 사유리의 인터뷰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과는 알고 지낸지도 오래됐고 연애도 오래 한 편인데 그때도 결혼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주변에서 난리였다. 연하인 남자 친구가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헤어져야 한다는 둥, 나이 들면 외롭다는 둥, 자식은 있어야 한다는 둥, 오지라퍼들의 말이었다. 주변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결혼할 생각이 없는데 주변에서 하도 그러니 당장 결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러나 때가 됐으니 더 나이 먹기 전에 쫓기듯 결혼하는 건 모두에게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결혼할 시기는 ‘내가 결혼할 마음이 있을 때’, ‘내가 외롭지 않고 안정적일 때’, ‘옆에 있는 사람’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이 프러포즈했을 때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남이 하니까 하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남의 결혼에 왈가왈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시어머니가 남편 친구 중에 결혼하지 않는 사람을 이야기하시면서 걱정하실 때가 있다. ‘우리 아들은 결혼했고 아이도 있으니 능력 있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으시다. 그 친구가 남편보다 부족한 사람이 아닌데 결혼 유무로 능력 여부가 판단되는 상황이 씁쓸하다. 연세 있는 분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만, 결혼하지 않는 친구들이 많은 입장에서는 좀 그렇다. 그래서 가끔 남편을 괜히 구제해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결혼해준 건데 잘 모르시나 보다.



| 나의 20대, 토닥토닥


나의 20대를 떠올려 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다. 하루 벌어 하루 살던 때라 다른 활동을 못한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학연수 한번 다녀오지 못한 게 너무 한이 된다. 자취를 하다 보니 짐을 버릴 수도 맡길 수도 없었고 체류 비용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가더라도 돌아온 후의 생활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꿈’이나 ‘취미' 등은 사치였다.


남들 유학, 해외 봉사, 대학원갈 때 뭐했냐는 면접관의 말에, 그동안 돈 벌었다는 대답. 남일같지 않아서 너무 슬펐다.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그때 아니면 못할 것 같은 일들을 무리해서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힘들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다?"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되받아치지 못했을 정도로 순했다. 여러 경험을 하면서 독해진 거지.


아무튼, 요즘 2, 30대 청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다. 청년들이 그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했으면 좋겠다. 교육이든, 공모전이든, 어학연수든. 물론, 나처럼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인 사람도 많을 거다. 그래도 나이가 들면 더 어려우니, 그때 그 시절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면 남는 건 아쉬움뿐이다.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그래서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20대의 나에게 괜찮다며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혼자 울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좀 기대라고. 술 좀 그만 마시고 그 돈을 모으라고. 어학연수 가라고. 물론, 듣지 않겠지만.


몇 년 전, 어느 후배가 대학생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고 하면서 <고백 부부>라는 드라마를 추천해줬다. 장나라를 좋아하기도 해서 기억해놓고 있는데 한번 보기 시작하면 너무 추억에 빠져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 손을 못 대고 있다. 정말 너무 펑펑 울어버릴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정말 울고 싶을 때 몰아서 보고 싶은데 자신 없다.


생각해보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내가 상처 준 사람도 많다. 나를 다독이고 응원해줬던 몇몇 사람들이 써준 편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도 버리지 못할 거다. 그 사람들은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 고운 할머니 되면 그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때 미안했다고. 그리고 정말 고마웠다고. 아마 다들 잘 살고 있을 거다. 나보다 훨씬 더.


후배들을 만날 때 듣는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다.


"누나(언니)는 그대로네요."

"누나(언니)도 예전 같지 않네요."


그대로란 말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과거의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고마운 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의 내가 자양분이 되어 오늘의 내가 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자양분이 될 테니, 성격은 까칠해도 다름을 인정하면서 할 말 하는 중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야겠다.


갈 때는 순서 없지만, 80세 인생의 반을 살았다. 힘내자!! 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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