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이라는 큰 기념일을 맞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는 화려한 무대가 설치됐고, 많은 이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그날을 축하했다. 수많은 관광객이 모인 희열의 분위기와 달리 무대 뒤에서 독일은 지금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우리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할 수 있는가?”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은 독일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화두다.
독일통일 이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구동독 지역민의 ‘불만’이 극우 정당을 낳았다는 평가는 우리나라에서도 익히 회자된 이야기다. 단지 그것뿐일까? 차별과 괄시, 실업과 돈 문제 때문일까?
독일은 그동안 겉으로 드러났던 현상의 이면을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독일 시스템의 근본, 기본법(헌법) 5조 1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을 말, 글 및 그림으로 자유로이 표현·전달하고,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알 권리를 가진다. 신문의 자유와 방송과 영상으로 보도할 자유는 보장된다. 검열은 허용되지 않는다.”
독일은 지금 이 기본법의 가치를 충실히 지키고 있을까. 지금 독일 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들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독일 주간신문 디 차이트(Die Zeit)가 지난 10월3일 독일통일 기념일에 공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구동독 주민 41%가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동독 시절보다 더 나빠졌거나 거의 변한 게 없다”고 답했다. 개인적인 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구동독 주민들의 과반수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구동독 주민들의 이러한 상황은 차이트의 표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문제는 돈이 아니야, 이 바보들아”.
또 다른 주간지 슈피겔(Spiegel)도 장벽주간의 가장 큰 테마를 ‘생각의 자유’로 꼽았다. 슈피겔은 베를린장벽 붕괴로 경계는 열렸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가 짙어지고 있다고 내다봤다. 그간 독일인들이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던 것, 여기에는 바로 그간 독일 사회를 휩쓸었던 극우 담론이 있다.
슈피겔은 해당 테마를 다루면서, 최근 진보진영의 대학생들이 우파 진영의 교수나 학자들의 강연을 반대하고 시위를 했던 사례를 언급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의 마이크를 빼앗아 버리는 것.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슈피겔은 이러한 문제 제기와 함께 ‘빌트(Bild)’지가 속해있는 미디어 그룹 악셀 슈프링어 대표 마티아스 되프너(Mathias Döpfner)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빌트지는 독일의 대표적인 보수 대중신문으로 소위 ‘깨어있는 시민’들이라고 여겨지는 독자들의 비판과 조롱을 독차지하는 매체다.
되프너는 이 인터뷰에서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은 끝내 그 반대 효과를 가져온다. 불관용·인종주의·이방인 혐오. 그 결과 양극단과 민주주의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앙겔라 메르켈을 언급했다. 앙겔라 메르켈의 메시지 가운데 상징적인 문구가 “우리는 할 수 있다(Wir schaffen das)”이다. 난민과 외국인 혐오가 난무한 곳에서 메르켈은 ‘환영문화(Willkommenskultur)’를 강조하며 대중들에게 ‘옳은 태도’를 강요해왔다는 것.
‘그건 옳지 않은 생각이야’라는 사회적 압박에 내 의견을 말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 나의 불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담론장을 가지지 못한 구동독 주민들. 침묵의 나선에 빠진 이들은 사회적 공론장이 아닌 술집에서, 집에서 친구들과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신 큰 소리로 내주는 극우 정당 ‘독일을위한대안(AfD)’에 한 표를 던진다.
되프너에 따르면 이건 도널드 트럼프의 ‘성공’ 사례와도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트럼프의 발언을 끔찍하다고 여기지만,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것. 그는 담론장의 부족함을 개선하지 않고 단순히 강력한 법으로 억누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다. 최근 독일이 허위 정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플랫폼을 대상으로 적용한 ‘네트워크집행법’은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에게 지금 필요한 건 담론의 장이다. 내 이야기를 하고, 그 반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준비. 정치적 올바름이라 여겨지지 않는 메시지도 일단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 우리가 믿고 있는 ‘올바름’은 모두의 올바름이 아니다. 침묵의 나선에 빠진 이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것. 독일을 휘어잡고 있는 극우의 기세와 이에 따라오는 온갖 혐오와 양극단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2019.11.17 미디어오늘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