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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30. 2021

우리는 서태지 세대가 아니라 신해철 세대였다

마왕 신해철을 기리며

나는 신해철 기사를 세 번 썼다. 맨 처음은 주다스 프리스트의 표절 관련해서(신해철이 표절한 것이 아니라 주다스 프리스트가 표절했다), 다른 한 번은 강헌 평론가와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을 제작했을 때, 마지막 한 번은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공연 때였다.


나에게 신해철은 대중음악으로 말하는 ‘민중가수’였다. 어쩌면 강남좌파의 시조새였을 수도 있겠다. 그에게 대중과 민중은 하나였다. 많은 반골 기질들이 그렇듯 그도 할말 다 하고 당할 짓 다 당하는 ‘할말다당’의 길을 택했다. 편하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 때 기획자였던 탁현민은 헤드라이너로 윤도현밴드를 섭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출연하지 않았고 그 빈자리를 신해철이 채웠다. 당시는 친노그룹이 ‘폐족’으로 불리고 있을 때였다. 마지막 곡으로 부른 ‘그대에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성공회대 운동장을 감동과 열정으로 채웠다.


우리는 서태지세대가 아니라 신해철세대였다. X세대 혹은 신세대로 불린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뮤지션은 서태지가 아니라 신해철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40대 후반~50대 초반의 사람들의 정서와 맞닿아 있는 인물은 서태지가 아니라 신해철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시골 출신인 내가 ‘촌스럽다’는 수식어로 평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그의 음악을 관통하는 나의 느낌은 촌스럽다는 것이었다.


서태지가 촌스러웠다면 누가 도시스러웠을까? 내 생각엔 신해철이 도시스러웠다. 둘을 비교하자면 투뿔 등심의 마블링과 안심의 고깃결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가 투쁠 등심의 마블링을 칭찬하지만 나에겐 그저 기름맛일 뿐이었다고 할까? 고기라면 육질이지.


서태지가 사회비판적이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사회비판 척’이었다. 많은 록가수들이 그랬듯. 그가 소환한 사회비판은 자본주의 첨단을 달리는 엔진의 하나일 뿐이었다. 반면 신해철은 사회비판적이 아니라 ‘사회비판가’였다. 서태지의 사회비판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비즈니스였다면 신해철의 사회비판은 불이익을 감당하는 투쟁이었다.


그런 신해철이 2014년 우리 곁을 떠났다. 구세대의 끝이 아닌 새로운 세대의 맨 앞에 섰던 가수. 음악적 메시지와 사회적 실천을 일치시켰던 사람. 그때 주변을 보니 남은 이들은 애도와 기억을 넘어 그를 통해 자신의 젊음을 회고하고 있었다. 당시 빈소가 집과 가까워서 퇴근할 때마다 들러보곤 했다.



마왕 신해철의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향년 46세,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 및 패혈증’이라는 병명이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여느 연예인의 죽음과는 결이 달랐다. 그를 애도하고 그의 노래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서 그를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죽음은 마치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 같았다.


특히 3040세대에 이런 경향이 강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는 신해철의 죽음을 계기로 각자의 1990년대를 회고하는 글이 줄지어 올라왔다. 영화 <건축학 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통해 젊은 시절 감수성을 되살렸던 그들은 신해철의 죽음을 보며 ‘이렇게 우리의 시대가 저물어 가는구나’라며 안타까워했다.


신해철에 대한 이런 광범위한 애도 분위기가 어찌 보면 낯선 측면도 있다. 그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연예인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신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스타일의 그는 대중을 불편하게 만드는 연예인이었다. 할 말 다 하고, 온갖 논쟁에 끼어들고, 심지어 정치적인 발언도 마다 않는 그에 대해 3040세대가 이토록 깊이 애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음악으로 현실을 노래했고 음악 밖의 발언으로 현실을 직시했다. 대중음악가가 음악이 아닌 방법으로 정치사회적 발언을 할 때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딱 쉬운 억압적 환경에서도 그는 결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의 음악을 듣거나 TV에 출연한 그를 볼 때면 현실을 두 다리로 우뚝 버티고 서서 내면의 목소리를 제 음악에 올곧게 실어내는 뮤지션과 당대를 함께한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고재갑·42)


“올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생각을 말하는 게 더 어려운 세상에서 그는 용기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머뭇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앞으로 나아갔던 귀한 존재다. 많은 사람들이 한 ‘연예인’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이유는 그가 대중과 떨어진 저 높은 세계에 존재하는 연예인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에 같이 발을 딛고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신재호·42)


“나이 든다고 저절로 기성세대가 되는 건 아니란 걸,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동시대 인물이었다. 밤마다 라디오를 호령했던, 마치 해방구 같고 코뮨의 잔치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그 혀, 그리고 껄렁하면서도 따뜻하고 참으로 똑똑했던 그 태도가 그립다.”(임선경·35)


1968년생 87학번(서강대 철학과)인 신해철은 나이로는 486세대에 속하지만 ‘X세대’ 혹은 ‘신세대’로 불렸던 1990년대 세대를 열어주었다. 구세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맨 앞에 섰던 가수였다. 486세대가 불합리한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싸울 때 그의 눈은 미래를 향했다. 그의 관심은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을 열어주는 것에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동년배들이 학생운동을 할 때 자신은 사랑 타령을 했다고 자학했던 그가 동년배들이 기성세대가 되어 보수화되었을 때 끝까지 남아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소셜테이너(사회 참여 연예인)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율배반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그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강조했던 메시지를 보면 초지일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상식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 그가 했던 모든 주장은 여기로 환원되는데 이것은 3040세대의 가치관과도 궤를 같이한다.


그의 정의는 추상적이지 않았다. 삶의 문제에서 찾았고, 그의 정의는 언제나 구체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진영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양쪽을 다 불편하게 하곤 했다.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 콘서트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요? 이명박요? 한나라당요? <조선일보>요? 저예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해자이기 때문에 문상도 못 갔고 조문도 못했고 담배 한 개비 올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적들을 탓하기 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우리가 건지지 않았다는 죄의식을 버리지 않았으면 해요.”


그는 자신의 무기인 음악을 통해 현실에 참여했다. 집회에 나갔다가 전경들에게 다른 학생들이 맞을 때 이를 숨어서 보기만 하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아침이슬’을 록 버전으로 편곡하기도 했던 그는 음악을 통해 평생을 두고 그 빚을 갚았다. 1992년 환경보호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를 기념해 발매된 앨범 <내일은 늦으리>에서는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신승훈·이승환·015B·윤상·신성우·이덕진·푸른하늘 등 당대의 스타를 대거 이 앨범에 참여시켰다.


2004년에는 음악평론가 강헌과 함께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앨범을 제작했다. 민중가요에 음악적 기여를 하고 싶어했던 그는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 “가수하면서 기회가 있으면 해보고 싶었던 게 있다. 바로 민중가요를 재해석해보는 작업이다. 이번 앨범은 내가 음악을 왜 하고, 음악이 나에게 어떤 보람을 주는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였다. 민중가요는 전부 소총 부대였다. 기관총과 박격포로 그 노래들을 중무장시켜보고 싶었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케스트라 반주로 제대로 녹음하는 것이다.”


그는 록의 저항정신을 거리 무대에서 구현했다. 그는 윤도현·이승환과 함께 가장 집회 무대에 많이 선 로커다. 자신의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이 원할 때 그들을 찾아 들려주었다.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집회와 2009년 노무현 추모 음악회에 헤드라이너로 나섰다. 그의 무대 가운데 가장 빛났던 무대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자신의 음악적 메시지와 사회적 실천을 일치시켰다.


이런 일관성 있는 사회 참여와 함께 또 하나 재평가받아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그의 음악적 성취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을 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조용필이 전주만 들어보고 대상을 예상했을 만큼 음악적 새로움을 보여주었던 그는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했다(58~59쪽 기사 참조). 압도적인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수십만의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이것이 그를 ‘음악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990년대 후반 댄스음악 위주로 대중음악이 평정되기 전까지 1990년대 초·중반은 대중음악계의 르네상스였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선보였다. 여기서 신해철과 그가 결성한 그룹 넥스트(N.EX.T)의 역할이 컸다. 시대를 앞서간 새로운 음악을 계속 선보이며 ‘음악적 선행학습’을 시켜주었다. 그래서 이후 다양한 음악이 수용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대중음악 평론가들 중에는 그를 서태지와 함께 1990년대 대중음악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한 라디오 음악방송 PD는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는 1990년대를 서태지의 시대로 알고 살았다. 서태지와 신해철을 비교하자면 음악적 뿌리가 록-헤비메탈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서태지는 댄스음악과 힙합을 접목했고, 신해철은 오히려 본격 록음악으로 점점 다가갔다. 서태지의 음악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며 엔터테이닝하고 휘발성이 강했다. 타깃도 10대에서 20대까지를 정조준했다. 신해철은 정반대다. 논리적이고 철학적이고 뇌 속으로 침전하는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서태지의 화려한 환영에 사로잡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실상 1990년대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가장 깊이 침투했던 가수는 신해철이었다는 사실을. 신해철이 죽고 나니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의 눈과 귀는 서태지가 사로잡았지만 그 시절 우리의 의식에 꾸준히 호소했던 가수는 신해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의 청춘, 우리의 1990년대가 서태지만의 것이 아니라 서태지와 신해철이 양분했음을 이제야 인정하는 것이다.”


 신해철에 대한 광범위한 애도 분위기는 다양한 형태의 재평가로 이어지리라 예상된다. 가왕은 조용필이고, 문화 대통령은 서태지이다. 하지만 마왕은 마성의 매력을 지닌 신해철의 자리일 것이다. 시대의 안타고니스트(악역·적대자)로 자신 있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당분간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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