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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Oct 06. 2021

부산국제영화제 제대로 즐기는 법

10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와 20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은 술을 마셨을 때,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은 추억을 만들었을 때를 꼽아보라고 한다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수위에 꼽힐 것 같다. 영화제에 가서 영화는 거의 안 보고 술 마시고 사람들 만나고 그들과 이런저런 추억을 만들곤 했다. 올해는 가지 못하는데 10년 전과 20년 전 영화제 이모저모를 정리한 글이 있어 겸사겸사 올려본다.  


2011년은 부산국제영화제가 16년 만에 새 집(영화의 전당)을 마련하고 손님을 맞았던 해다. 그 해 영화제는 마치 집들이 같았다. 비좁았지만 나름 운치가 있었던 초기 남포동 시대를 지나 해운대 백사장의 가건물에 살림을 차리고 해변의 낭만을 즐겼던 영화제는 이제 번듯한 집에서 국내외 영화인을 맞이했다.


영화인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를 만나는 곳이라기보다 영화 하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다. 영화제가 시작될 무렵이면 “부산에 가느냐”라며 안부를 묻기 시작하고 출석 여부가 확인되면 술 약속이 잡힌다. 그러나 구체적이지는 않다. ‘어느 날 밤에 보자’ ‘누구누구랑 보자’ 하고 여유 있게 잡아둔다. 영화제에 오면 스케줄이 워낙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 만나게 된다.


부산역에 내리는 순간부터 만남의 연속이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마주치고, 택시를 기다리며 마주치고, 행사장에 들어서다 마주치고, 취재하다 마주치고, 술 마시러 가다 또는 마시고 나오다 마주친다. 마주치면 옆의 누군가를 소개받는다. 그렇게 피라미드 마케팅처럼 아는 영화인을 통해 새로운 영화인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영화 세계를 만나게 된다. 



부산의 가을은 영화계의 후한 인심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숙소 예약이 취소되어 애를 먹고 있는데 개막식이 열리는 영화의 전당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여균동 감독의 트위터 멘션을 받았다. 자신의 호텔방을 이용하라며 객실을 알려주었다. 완곡히 사양하고 술자리에서 보자고 청했는데, 알고 보니 그의 마음속에는 85호 크레인 위에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밖에 없었다. 개막식을 마치자마자 복국 한 그릇을 먹고 영도 한진중공업으로 향한다고 했다. 


여 감독만이 아니었다. 영화산업 노조와 감독조합 등 많은 영화인들이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그리고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주민과 함께하기 위해 영화제에 홍보 부스를 만들기로 했다. 이들을 자극한 것은 ‘부산국제영화제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영화인들이 5차 희망버스를 반대한다’는 보수 언론의 보도였다. 영화를 세상과 무관한 관변 예술로 보는 이런 시선을 불식시키기 위해 영화인들이 김진숙 지지 선언을 했다. 김진숙씨가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276일째를 기념하기 위해 276명을 모으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불이 붙어 1543명으로 동참 영화인 수가 불었다. 해외 영화인들까지 가세해 10월8일 영화제 현장에서 출발하는 ‘영화인 희망버스’에 함께 오르기로 했다.


고 이춘연 이사장님


개막식 레드카펫 옆에서 드레스를 차려입고 들어서는 여배우들의 자태에 홀려 있는데, 김혜준 부천문화재단 대표에게서 문자가 왔다. 추운데 대구탕이나 한 그릇 먹고 몸을 녹이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영화제 데일리 리포트를 만드는 〈씨네21〉 이영진 기자가 함께 있었다. 영화계 현황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둘은 강한섭·조희문 등을 내세워 영화계 접수에 나섰던 MB 정부가 끝내 영화계의 단단한 결속력에 밀려 후퇴했다며 웃었다. 이번 영화제에는 KBS 김인규 사장이 수족을 데리고 와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대구탕을 먹은 곳은 ‘속 씨원한 대구탕’이라는 집이었다. 영화제에 오는 영화인들이 맛집으로 인정한 곳이다. 영화제 덕분에 유명해진 맛집들이 대부분 그 맛을 잃는데 이곳과 ‘할매집 복국’ 등은 꾸준한 손맛으로 사랑받고 있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소설가 박범신 선생과 인사를 나눴다. 역시 영화제를 찾은 것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배우’ 자격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전규환 감독의 〈바라나시〉에 출연했다고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박범신 선생처럼 영화와 인연을 맺은 문화예술인들도 많이 만날 수 있다.


개막작 상영이 끝날 무렵 배우들이 리셉션이 열리는 그랜드호텔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텔 로비에는 포토존을 설치하고 일반인을 통제했다.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았다. 예전에는 일본 관광객 일색이었는데 이제 중국어, 타이어 등으로 언어가 다양해져 있었다. 여행사들이 영화제 특별 여행상품을 만들어 이들을 적극 유치한 결과였다. 개·폐막식에 이들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로비 라운지에서 신인 배우 유윤정씨를 만났다. 호텔 로비는 배우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해외 영화인들은 호텔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아 자주 만날 수 있다. 유씨는 추상록 감독의 〈감〉이 영화제에 출품되면서 처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유씨는 그러나 개막작 상영이 시작되기 전에 개막식장을 나왔다. 대부분의 여배우도 그렇다. “여배우들은 대부분 개막작 상영 전에 나왔다. 추워서 더 있을 수가 없다. 노출 의상을 입고 10월 바닷바람을 맞으며 더 있을 수가 없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여배우들이 영화제 개막식을 끝까지 못 지키는 이유가 추위 때문만은 아니다. 개막식장은 ‘여왕처럼 들어가서 하녀처럼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입장하지만 개막작 상영이 끝나면 유명인과 일반인이 뒤엉켜 나온다. 그냥 파묻히면 차라리 다행이다. 의상과 머리에 ‘나는 배우’라고 쓰인 격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그래도 배우들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불러주었으면 싶은 영화제다. 배우를 초청할 경우 영화제 측은 2박3일 숙박권과 항공권 정도를 제공한다. 대신 배우는 개막식에 참석하고 이튿날 ‘스타로드’에서 영화제 참석 관객들과 만날 의무가 있다. 출품작이 없어도 계속 찾는 배우들이 있는데 ‘영화제에 나오는 배우’라는 이미지가 캐스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막식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러 간 ‘이씨 할매 횟집’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도 영화제 영향권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같은 술자리에서 한국영화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리아리〉를 찍은 허철 감독을 만났다. 작품이 흥미로워 취재를 하려고 했는데 우연히 술자리에 동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화인들이 들어왔다 빠지곤 하다 정지영 감독이 합석했다. ‘영화인 희망버스’를 주도 중인 정 감독과 배우 윤진서씨는 허철 감독의 〈아리아리〉에서 다큐멘터리를 이끌어가는 화자로 출연했다고 한다. 다음 날 시사회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술자리를 파했다. 새벽 3시였지만 곳곳에서 영화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아래는 2001년 썼던 부산국제영화제 르포 기사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생선에 비유하자면 갓 잡아 올린 물 좋고 싱싱한 횟감이다. 자갈치 시장의 물 좋은 생선처럼 퍼덕퍼덕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영화들이 세계 영화인들의 입맛을 자극한다. 6년 만에 키가 부쩍 큰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아시아의 영화를 세계에 소개한다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예술 영화들이 모여드는 진정한 국제 영화제로 발돋움했다. 11월 9∼17일 펼쳐진 이 '각본 없는 드라마'의 장면 장면을 살펴보았다.


장면 하나 : 대영시네마 앞 도로


"영화 잘 보셨으면 조금만 보태주세요." 자신을 자라왕(19)·빨간개구리(19)라고 소개하는 신세대 거지 2명이 구걸에 열심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구름처럼 몰려든 관객들을 보고 이들은 우유팩으로 즉석에서 구걸통을 만들고 동냥질을 시작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화제만 같아라"라고 말하는 택시 운전사 박진웅씨(60) 말마따나 영화제는 이제 부산 시민 모두의 잔치로 자리매김한 것으로 보인다.


장면 둘 : 대영시네마 현관


"오늘 저녁 8시30분, 대영시네마 1관 〈낙타들〉 표 필요하신 분 계십니까?" 자원봉사자 강근철씨(20)가 반환된 표를 사갈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목청껏 외치고 있다. 확성기마저 고장 나서 목이 완전히 잠겼지만 그의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는다. 6년째 자원봉사를 하는 김삼생씨(67)를 비롯해 3백50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는 영화제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야외 행사 담당인 홍철영씨(29)는 매일 밤늦게까지 남아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해준 자원봉사자가 없었다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면 셋 : 대영시네마 옆 카페


6년째 영화제에 개근하는 시네마키드 박상수씨(21)가 잠시 쉬고 있다. 이번에도 영화 25편을 예매하고 내려온 그는 밤이면 숙박비를 아끼느라 찜질방과 PC방을 전전하며 영화 사냥에 나서고 있다. 방세를 빼서 영화제에 온 상명대 영화학과 전성희씨(21)도 박씨 못지않은 시네마키드다. 송일곤 감독을 너무 좋아해 '엉아'라고 부르는 전씨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부산에 머무르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장면 넷 : 다시 대영시네마 현관


이번에 〈수취인 불명〉과 〈나쁜 남자〉를 영화제에 출품한 김기덕 감독이 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사람들을 피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씩 다가온다. 부산에서 그의 사인을 받아간 사람은 대략 천 명. 그의 영화를 개봉관에서 본 관객 수와 맞먹는 셈이다. 흥행에 참패한 김감독의 영화 표가 거의 매진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그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어 가는 곳이다.


장면 다섯 : 대영시네마 3관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어서 고맙다." "다시 개봉하면 반드시 주변에 추천하겠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상영이 끝나고 감독과 배우가 관객에게 인사하려고 무대에 오르자 찬사가 쏟아졌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패자부활전을 이끌고 있는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는 "여러분 덕분에 힘을 얻었다. 얼마나 관객이 많이 드느냐와 상관없이 반드시 부산에서 재개봉하겠다"라며 화답했다.


개봉을 앞두고 작품성 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흥행에 참패해 의기소침했던 〈꽃섬〉 감독과 배우들도 카페를 빌려 관객과 만나는 등 전방위 홍보에 나섰다. PIFF 광장에서 장미꽃 한 송이와 영화 홍보 엽서를 나누어 준 뒤 엽서를 버린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배우 김혜나씨(21)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장면 여섯 : 부산극장 옆 카페


〈삼사라〉의 판 나린 감독(독일)이 관객들과 5시간 가까이 자기 영화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다. 원래 토론토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하려고 했던 그는 이번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하게 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는 지금 몇시니?〉의 차이밍량 감독(타이완)은 너무나 분석적인 관객들에게 시달린 나머지 제발 영화를 가볍게 보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장면 일곱 : 씨네시티극장 3관


독립 장편 영화 발전에 대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김혜준 정책실장이 다른 토론자와 갑론을박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다. 영화제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영화제에서 김실장은 세미나 세 곳과 각종 토론회에 참여했다.


장면 여덟 : PIFF 광장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에서 삽시다." 배우 명계남씨가 〈조선일보〉 반대운동에 관한 인쇄물을 돌리고 있다. 명씨의 뒤를 따라오며 한 남자가 "왜 명계남이 〈조선일보〉를 반대하는지가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천원입니다"라고 말하며 책을 판다. 명씨는 책을 산 사람에게만 사인해 준다며 그와 보조를 맞춘다. 부산은 영화인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목소리를 담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장면 아홉 : 코모도호텔 2층 커피숍


미로비전 채희승 대표(27)가 영화 해외 배급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루빙 젠 감독의 〈크라이 우먼〉을 맡고 있는 채대표는 반응이 좋아 연신 싱글벙글이다. 직원들이 전부 나서도 몰려드는 상담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이다.


장면 열 : 코모도호텔 1층 충무홀


유럽 영화 세일즈에 나선 EFP(European Film Promotion) 클라우디아 랜드버거 대표가 함께 온 배우와 감독 들을 소개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 되면서 발 빠른 세계 영화인들은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있다. 자신의 영화사 'Applause Pictures' 주최로 파티를 연 〈첨밀밀〉의 천커신 감독 외에도 각종 리셉션과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모으는 해외 영화제 관계자들은 많았다.


장면 열하나 : 남포동 인근 재즈바


한국 영화인의 밤 파티가 열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 영화인보다 외국 영화인이 더 많다. 이들은 백세주를 병째로 마시는 진풍경을 연출하면서 부산의 밤을 즐기고 있다. 이런 파티는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본에서 온 게이코 이타가키 씨는 "이런 파티가 도쿄영화제에서 열렸다면 집안잔치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면 열둘 : 해운대 해변가 포장마차


〈수취인 불명〉에 출연한 반민정씨(23)와 〈나쁜 남자〉의 배우 서 원씨(23)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관객들을 만나고 영화를 보느라 정신없이 낮 시간을 보낸 이들은 밤에나마 여유와 낭만을 만끽하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남포동 극장가와 달리 숙소가 몰려 있는 해운대는 나무랄 데 없는 휴양지이다. 부산은 영화제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가기에 안성맞춤인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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