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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28. 2021

나영석PD 후계자로 유호진PD가 낙점된 까닭

<1박2일> 막내PD시절 유호진PD를 만난 적이 있다.


확실히 떡잎부터 달랐다. <1박2일> 막내PD 시절 유호진을 만났다(과 후배다). KBS가 이명박정권의 방송 장악에 맞서 파업할 때였다. 서로 남는 게 시간이어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관해 수다를 떨었는데,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설득력이 있었다. 예능PD는 머리도 좋고 감각도 있고 또 사람을 아우를 줄 알아야 하는데, 유호진이 그랬다. 벌써 10년도 지난 과거지만, 그때 나누었던 수다를 정리해 보았다. 


당시에는 출연자들을 일정한 상황에 빠뜨리고 그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관찰하는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사람들이 드라마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소통하기 위해서는 꼭 봐야 할 이야기의 원전이 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왕좌를 차지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유호진PD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성패를 가르는 것으로 대략 4가지가 꼽혔다. 나영석PD가 나간 뒤 <1박2일>이 휘청했는데, 유호진PD가 와서 <1박2일>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아래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전략적 사고를 하는지 알 수 있다.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좋은 여행그룹을 구축할 때 참고할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복기해 본다.  



2009년 KBS 파업(제작 거부) 당시 유호진PD(오른쪽)


주) 아래 내용은 유호진 PD가 전부 얘기한 것이 아니라, 유호진 PD와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1) 관계 맺기의 미학 


TV 예능 프로그램은 대략 4단계의 발전 단계를 거쳤다. 1단계, 단순한 ‘개인기의 시대’가 있었다. 이어 재미있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설정의 시대’가 열렸다. 이 ‘설정의 시대 - 캐릭터의 시대’에서 한발 더 나간 것이 바로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이다.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은 ‘관계 맺기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일정한 캐릭터들이 서로 놀리고 골리다가 풀어지고 돕고 배신하며 다양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바로 핵심이다. 은지원이 ‘은초딩’이라는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같은 강호동에게 깐죽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캐릭터를 잡지 못해 존재감이 없던 김수로도 이천희와의 관계를 통해서, 며느리 괴롭히는 시누이 같은 ‘밉상’ 캐릭터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시 캐릭터를 잡지 못하던 김종국도 부모의 재혼으로 함께 살게 된 이복남매 같은, 이효리와의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프로그램에 안착할 수 있었다.  


유호진 PD는 이것을 수학의 개념인 ‘팩토리얼’로 설명했다. 단순하게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둘의 관계에 다른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어오고 또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다양한 경우의 수가 열린다는 것이다.



2) 주도그룹과 안티 그룹의 각축


잠자리와 먹을거리가 부족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은, 더군다나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은 피곤한 일이다. 개별화된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누리꾼들은 현실에서는 그런 번거로움을 회피한다. ‘혼자 노는 세대’인 누리꾼에게는 그런 원경험이 적어서 이런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에 더 호기심을 갖는 것 같다.


6~8명의 소그룹이지만 그 그룹 안에서도 주도그룹과 안티 그룹이 나뉜다. 대체로 유재석 강호동 등 진행자를 중심으로 한 주도그룹이 있고 박명수 윤종신 등 뒷방 어른을 중심으로 한 안티 그룹이 있다. 어느 그룹에 속할 것인가, 그 그룹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출연자가 느끼는 스트레스를 즐기는 것 같다. 주도그룹과 안티 그룹이 일진일퇴를 하는 과정에서 간단한 드라마들이 만들어진다.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설계된 겹겹의 긴장감을 더욱 실감 나게 느끼려면 그중 한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하면 된다. 각 세대가 투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캐릭터가 준비되어 있다. (이는 이미 드라마에서 많이 이용되는 기법이다.) 각각의 캐릭터는 밀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투사해서 상황을 함께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대를 대신해서 할 말을 다해줘야 한다.



3) 가학과 피학의 정교화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벌칙을 정해놓고 경쟁하는 코너다. 예능 프로그램의 가학성에 대한 지적이 꾸준히 나오지만, 이 부분을 빼면 뭔가 빠진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가지 진화한 것이 있다. 이전에는 가학적인 벌칙 장면 자체를 즐기게 만들었던 데 반해, 지금은 벌칙을 받게 되는 과정까지의 긴장감을 즐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매를 맞기 위해 기다릴 때 공포가 매를 맞는 순간보다 더 괴롭듯, 벌칙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즐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벌칙에 이르는 과정이 정교하게 설계된 것과 함께, 벌칙을 수행하는 과정 또한 잘 설계되어 있다. 일단 정해진 벌칙은 반드시 수행하게 만들지만, 그 벌칙이 단순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결과를 남길 수 있도록 승화되어 있어서 하나의 드라마를 또 만들어 낸다.



4) 간섭의 최소화


유호진 PD는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 제작진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리얼리티’라고 했다. 시청자들에게 리얼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출연자들이 진짜 자신처럼 행동해야 최선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1박2일>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몰카(완전 몰카는 아니고 자동 녹화 카메라)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행동거지가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얼리티 프로그램 제작진은 현장 인원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이런 프로그램에 불문율이 있는데 바로 현장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사 연예 정보 프로그램에도 공개를 하지 않는다. 그런 ‘이방인’이 촬영장에 오면 출연자들이 그들을 의식하게 되고 그러면 녹화를 망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패밀리가 떴다>의 대본이 공개되어 논란이 일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리얼리티 체험 프로그램에는 그런 대본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대본이 따라 하라는 대본이 아니라 그런 설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 하나를 제시한 것이라는 것이다. 유호진 PD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대본은 최악을 겨우 피하는 ‘차악의 선택’이라고 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대본대로 갔다는 것은 촬영을 완전 망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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