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Aug 28. 2023

감탄과 존경 그리고 공감의 스위스 일주

가난한 산악국가에서 유럽의 부국이 되는 과정


9월 중순 알프스 5대 트레킹을 떠난다. 돌로미테 트레킹을 함께 했던 임덕용 대장님이 이번에도 트레킹을 이끌어 주시기로 했다.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일대의 알프스 미봉 둘레길을 걷는 코스인데, 이 중 스위스는 10년 만에 간다. 스위스관광청 초청으로 스위스 일주를 했었는데 그때 기록했던 것을 바탕으로 다시 재정리해 보았다.   


스위스는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어 한국인이 유럽 관광을 갈 때 세 번째로 많이 찾는 나라다. 그러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스위스는 ‘거쳐서 가는 나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패키지여행의 경우 일본인들이 개척해 놓은 관광 코스를 따라가는데 대략 취리히와 호수가 예쁜 루체른, 그리고 융프라우로 가는 인터라켄을 거친다. 



이렇게 스위스를 보는 것이 ‘효율적’ 일지는 모르지만 ‘효과적’이지는 않다. 짧고 저렴하게 가더라도 진짜 스위스를 느낄 수 있는 코스는 얼마든지 더 있다. 독일인의 정밀함과 프랑스인의 예술 사랑, 그리고 이탈리아인의 여유를 두루 지닌 진짜 스위스를 맛볼 수 있는 코스를 여행하며 스위스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스위스는 '배우러 가는 곳'이 아니라 '느끼러 가는 곳'이다. 대자연의 웅장한 스펙터클을 누리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깨달으면 된다. 헤르만 헤세,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 프레디 머큐리와 같은 이들이 스위스를 사랑했던 이유는 우리가 스위스를 가야 하는 이유와 일치한다. 

 


먼저 스위스인의 자연 극복 정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스위스는 토목과 건축 강국이다.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압도적인 자연을 다스리는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자연의 한계를 그들은 '기술적 상상력'으로 극복했다. 


스위스의 수도사들에게서도 이런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레만 호수 근처 라보 지역 포도밭이 바로 그 증거다. 중세 수도사들이 가파른 언덕에 계단식 포도밭을 만들었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은 곳까지 약 40 계단의 포도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밑에서 보면 마치 요새 같다. 


라보 지역 와인은 인기가 좋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외에도 낮에는 레만 호수에 반사된 태양열을 받고 밤에는 돌담이 품은 열기를 받아 포도의 당도가 높기 때문이다. 라보 지역 포도밭을 따라 트레일과 자전거 코스도 조성되어 있어 높은 곳까지 케이블트레인을 타고 올라간 뒤 내려오면서 인근을 둘러볼 수 있다.  



스위스가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던 비결은 '유명인의 입소문 덕분이다' 1·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켰던 스위스에는 수많은 유럽 지식인과 예술인이 피신해 왔다. 스위스에 여행 온 괴테가 빌헬름 텔의 이야기를 들은 뒤 친구인 실러에게 전해줘 소설화되고, 다시 로시니가 ‘윌리엄 텔 서곡’을 만들어 스위스를 알렸듯 유명인들이 스위스 홍보대사 구실을 했다. 그렇게 스위스가 세계화되었다. 


유명인들의 고향이 아니라 '유명인들이 영감을 얻은 곳'이라는 것은 여행자에게 묘한 설렘을 준다. 스위스에서는 헤르만 헤세가 산책한 곳, 프레디 머큐리가 멍 때린 곳 등 유명인의 흔적을 찾아 여행할 수 있다. 



레만 호수 근처에서도 프레디 머큐리와 찰리 채플린, 오드리 헵번이 말년을 보낸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전쟁 중 망명 온 화가들이 모여 다다이즘을 만들어낸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는 현대미술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헤르만 헤세가 생의 절반을 보낸 루체른 근처의 테신 지역에는 헤세 기념관과 헤세의 묘지, 그리고 헤세가 걸었던 사색로가 남아 있다. 


다음은 ‘관광객’에서 ‘휴양객’으로 진화하는 방법이다. 스위스는 바라보기만 해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직접 체험해야 한다. ‘아름다운 베르네 맑은 시냇물이 넘쳐흐르네’라는 동요 속의 베른 시는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유학했던 곳으로, 영월 동강을 닮은 개울이 구시가지를 휘돌아 흐른다. 물이 깨끗하고 여울이 깊지 않아 여름에는 시냇물을 따라 수영과 래프팅을 할 수 있다. 물이 차면 베른 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돌아보면 된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스위스에서는 트레킹이나 자전거 하이킹을 꼭 해보는 게 좋다. 산악 지형이라고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 웬만한 곳은 케이블카나 케이블트레인이 올려다 준다. 길을 잃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대부분 V자형 계곡이기 때문에 능선과 계곡을 따라 걸으면 절대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길 표지판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걷기 프로그램은 베트머알프와 리더알프 지역에서 알레츠 빙하를 따라 내려오는 빙하 트레킹이다. 눈이 아직 남아 있는 4~5월 넓은 스노슈즈를 신고 눈 위를 걸어 빙하를 따라 내려올 수 있고, 눈이 녹은 여름철에는 빙하를 종단할 수도 있다. 녹이면 전 세계 사람들을 몇 년간 먹일 수 있는 물이 나온다는 광활한 빙하를 내려다보며 걷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이다. 빙하 트레킹은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균열)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스위스의 트레킹 코스로는 제주올레와 ‘우정의 길’ 협약을 맺은 체르마트 트레일도 빼놓을 수 없다. 체르마트는 모든 운송수단을 전기로 움직이는 생태마을로, 마을 자체가 구경거리다. 파라마운트 영화사 로고에 나오는 마터호른 산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데, 여성스러운 융프라우를 보기 위해 인터라켄에서 관광객에게 치이는 것보다는 체르마트에서 강인한 남성 같은 마터호른을 보며 휴양하는 편이 훨씬 낫다.


체르마트 외에 스위스에서 추천하고 싶은 곳은 유일한 이탈리아어 권역인 티치노 지역이다. 음식 맛이 좋고 인심이 후하면서 지역 차별을 당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전라도와 닮은 지역인데, 프리 알프스 지역(알프스 근교)이어서 산세가 험하지 않아 부담이 없다. 동양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산수화 속 자연을 닮은 산과 계곡이 있고 멀리 만년설에 덮인 알프스 고봉이 두루 보여 최고의 경관을 선사한다. 



티치노 지역의 중심지가 벨린초나인데, 알프스의 산해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할 때 남하하던 길목에 있는 도시로 유럽에서 알프스를 지나 이탈리아로 갈 때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군사 요충지였던 만큼 성이 발달해 지금도 큰 성 세 개가 도심에 있다. 예전처럼 연결은 되지 않았지만 능선을 따라 성곽이 늘어선 모습이 만리장성을 연상하게 한다.


벨린초나 지역은 계곡물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색깔을 보여준다. 특히 눈이 녹아 흐르는 봄철의 물은 고려청자의 옥빛만큼 맑아서 물속 수미터 바닥이 선명하게 보인다. 007 시리즈 ‘골든 아이’ 편에 나온 번지점프 시설도 있는데, 현재 운영 중인 번지점프 중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번지점프 시설이 댐 위에 만들어졌는데 댐 벽이 반사판 노릇을 해서 떨어질 때 비명 소리가 공포스럽게 울린다. 



티치노 지역은 스위스에서는 가장 가난한 지역인 데다 지역 차별을 받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지역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세계적 마임이스트인 드미트리는 로카르노 옆 고향 마을에서 극장과 마임 학교를 설립하고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아직 무대에 오른다. 그의 고향마을은 그를 찾아온 팬들로 주말마다 문전성시를 이뤘다. 


강남 교보타워와 삼성 리움미술관을 설계한 마리오 보타 역시 티치노 지역을 거의 떠나지 않고 활동한다. 티치노 지역 곳곳에서 그가 설계한 건물들을 둘러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해외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설계한 건물과 고향의 자연을 재해석해 지은 건물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밖에서 벌어서 안에서 베푸는' 마리오 보타의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스위스 도시를 둘러볼 때는 변두리 지역의 재개발 구역을 보면 좋다. 공장지대나 우범지역을 멋진 도시계획으로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시켜 놓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로잔의 플론 지역이나 취리히의 웨스트취리히가 대표적이다. 두 지역 모두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내부를 공연장이나 극장 전시장으로 바꿔 문화 예술적인 공간으로 변모했다. 클럽도 많아 낮에는 예술의 중심이지만 밤에는 유흥의 중심지가 된다.


웨스트취리히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포장용 천과 폐타이어를 활용해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 본사 건물이다. 폐컨테이너를 쌓아서 매장과 사무실로 사용한다. 제련소 건물을 기중기나 수증기 밸브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인테리어로 재활용한 쇼핑몰도 인상적이다. 각종 박람회와 패션쇼가 열린다. 스위스에서는 정해진 길보다 길 밖에서 진짜 스위스를 만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