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의 소도시 브렙(Breb)을 들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들어본 사람도 드물 텐데. 브렙은 사실 소도시라 하기에도 작다. 소읍 정도의 크기다. 루마니아 북동부의 분지에 자리 잡은 이 소읍을 사랑하게 되어 '루마니아 스몰 럭셔리 투어'를 어른의 여행 큐레이션의 <월간 고재열>의 여행 세시풍속에 등재하기로 했다.
브렙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영국의 찰스 3세다. 루마니아는 그가 황태자 시절 휴양지로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중 한 곳이 바로 브렙이다. 황태자가 왜 이런 촌구석에 휴가를 올까 궁금했는데,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순간 바로 의문이 풀렸다. 프랑스-스페인 소도시 기행 때도 볼 수 없었던 그림 같은 마을이 구릉 위에 사뿐히 앉아 있었다. 능선길에서 브렙을 처음 내려보았을 때 느낌은 이탈리아 돌로미테의 코르티나 담페초 마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슴을 부풀게 했다.
솔직히 브렙에 이르기 전까지, 루마니아의 풍경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헝가리의 매력적인 와인마을 두 곳, 에게르와 토카이를 ‘수박 속 핥기’로 보고 루마니아 국경을 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나마 헝가리 쪽 루마니아 국경 마을들은 정갈했는데 동쪽, 우크라이나 국경 쪽은 빈한한 사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여기서 어떤 여행의 답을 얻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와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국경 마을을 지날 무렵 외교부에서 문자가 하나 왔다. “[외교부] 우크라이나는 현재 여행금지국이니, 즉시 안전한 지역으로 대피 철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문자까지 받고 보니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여행감독을 믿고 루마니아 답사여행에 따라온 '어른의 여행클럽 <트래블러스랩>' 멤버들에 대한 미안함도 생겼다.
그런데 브렙 마을을 내려다보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내가 동유럽에서 보고 싶었던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마을이구나, 저기서 그냥 멍 때리고 싶다'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좌청룡 우백호, 육중한 능선 사이에 너무나 평화롭게 내려앉아 있는 분지마을이었는데 들꽃과 어우러져 전에 본 적 없는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어 냈다.
이 마을을 루마니아 답사여행의 첫 번째 기점으로 삼은 마담K(동유럽허비학교 이기영 교장)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카서스 기행에서는 카즈베기에서 2박을 하는데 '루마니아 스몰 럭셔리 기행'에서는 이곳에서 2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여행사는 이곳에서 숙박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이라(숙소가 없다), 차별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검색을 해보니 두 번째 의문이 풀렸다. 찰스 황태자는 이곳에 단순히 휴양을 온 것이 아니었다. 해비타트처럼 마을 재건을 돕고 있었고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이곳의 매력을 알리고 있었다. 브렙 마을을 위해서라면 인터뷰를 자처해서 왜 우리가 이곳을 보호해야 하는지 역설했다.
관련 동영상을 보니 찰스왕이 높이 산 것은 '자연관 인간의 밸런스'였다. 자연과 문명, 인간과 가축이 밸런스를 이룬 곳이라는 것. 그래서 이런 곳을 보전해야 한다는 것. 그는 지붕 보수 등 브렙 재건사업을 함께 했다.
인간과 공존하는 가축들이 내뿜는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마을길을 걸어 숙소에 도착한 뒤 세 번째 의문이 풀렸다. 마을의 한 할배가 찰스왕과 이 마을의 인연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루마니아 출신이고, 죽어서도 루마니아에 묻혔다고.
손발이 부지런하고 대답이 똑 부러졌던 민박집 여주인 안드레아가 <웬즈데이>의 여주인공을 닮아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는 그 드라마를 안 봤다고 했다. 루마니아가 배경인데 안 봤냐고 묻자 그녀는 <웬즈데이>의 여주인공처럼 시크하게 답했다. “난 애가 넷이야” 마담K가 나중에라도 꼭 보라고 말했을 때도 그녀는 시크함을 이어갔다. “응, 5년 뒤에”
브렙 마을에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 차는 조심스럽게 카르파티아산맥의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피레네산맥이 유럽의 좌청룡이라면, 체코/슬로바키/우크라이나/루마니아/세르비아를 가로지르는 카르파티아산맥은 유럽의 우백호다. 진즉 와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찾게 되었다.
알프스산맥에 비해서는 낮은 산맥이고 높은 산도 2500미터 안팎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5월에 설산이라니? 감탄하며 구릉을 오르는데 멀리 풀밭에서 보라색 들판이 보였다. 본 적 없는 들꽃이 마치 들판에 색칠을 해놓은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금껏 보았던 들꽃 중 가장 예쁜 곳이었다.
사실 우리 버스를 멈춘 것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수도원이었다. 루마니아는 드라큘라의 실제 모델인 '블라드 드라쿨' 백작이 살았던 나라고, 그와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브란성이 드라큘라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브란성 외에도 루마니아에는 아름다운 성과 성당 그리고 수도원이 많았다. 우리가 카르파티아산맥을 넘다 발견한 수도원도 그런 곳 중 한 곳이었다.
동방정교에 속하는 루마니아정교의 성당과 수도원 중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 많은데 그중 '동유럽의 시스티나성당'으로 꼽히는 보로네수도원은 특히 중요한 곳이다. 이곳의 프레스코 벽화에 대해 마담K는 열변하며 설명했다. 외벽의 프레스코화 중 빛을 받은 쪽은 거의 지워졌지만 반대쪽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유럽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문자를 읽지 못하는 평민을 위한 '그림으로 보는 성경'인데 보로네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일생을 담은 그림을 비롯해 성경의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성경 내용과 그림 내용을 맞춰보는 재미가 솔솔 했다. 보로네수도원이 있는 협곡은 루마니아의 대표 휴양지 중 한 곳이어서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천천히 내려왔다.
시기소아라는 브렙만큼 매력적인 고성 마을이다. 마을 언덕 위해 성벽이 에둘러져 있고 이 안에 성당과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몇몇 집이 숙박시설로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이용한 숙소는 1513년에 지은 건물로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었다. 차량은 마을 아래에 두고 짐은 직접 옮겨야 했다.
시간을 꾹꾹 눌러 말아놓은 시기소아라를 산책하며 우리는 시간의 두루마리를 풀어내며 여유를 즐겼다. 밤엔 밤이라서 좋았고 새벽엔 새벽이라서 좋았다. 시기소아라는 블라디 드라쿨 백작이 태어난 마을이다. 그런데 음산함이 아니라 좋은 기운이 우리를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비스크리는 찰스 황태자가 별장으로 썼던 집이 있는 동네다. 그래서 관광객이 제법 찾는 곳인데 별장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지, 외부에 개방되어 있다. 소박했다. 비스크리 마을의 평범한 농가 중 하나였고 찰스 황태자가 이용했던 기물과 그가 이곳에서 했던 보호운동이 소개되고 있었다.
독일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뒤뜰에 나선 순간 왜 찰스 황태자가 이 마을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낮은 구릉의 벌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벌판의 양 떼를 지켜보며 낮잠을 즐기는 양몰이 개의 심정으로 편안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주) 찰스 황태자와 루마니아의 이야기는 '앵글로 색슨'의 원류 중 하나인 '작센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