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Mar 23. 2024

루마니아의 여행 지정학

루마니아는 크게 트란실바니아 몰다비아 왈라키아 지역으로 구성된다


# 루마니아의 여행 지정학


여행기를 있어 보이게 쓰는 방법 중 하나는 지정학을 들이미는 것이다. 검색만 하면 술술 나오고 복붙 해서 적당히 다듬으면 되는데, 써놓고 보면 상당히 있어 보인다. 보통 가방 끈 긴 사람들이 애용하는 수법이다.


학사 출신이라 가방끈이 짧지만 기사로 써야 할 때가 있어서 그런 지정학을 슬쩍 써먹곤 했다. 그런데 여행감독이 되고 보니 ‘여행지정학’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즉 단순히 알아가는 맛이 아닌 여행에서 유용한 지정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마니아는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왈라키아-트란실바니아-몰다비아의 삼국시대를 거쳤다. 그것도 근세에 거쳤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남아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시기에 삼국이 각축하기도 했지만 수나라 당나라 등 외세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왜나라 등 외세와 연합을 맺기도 했는데 루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남서부의 왈라키아는 오스만튀르크의 영향을, 중부의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영향을, 동부의 몰다비아는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일부가 몰도바로 독립).


루마니아 지도를 보면 카르파티아 산맥이 마치 아이스크림 스푼처럼 루마니아의 중원을 퍼내는 형상인데 그 안쪽이 트란실바니아다. 스푼 바깥쪽 위가 몰다비아, 아래가 왈라키아다. 루마니아 여행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나들며 이 세 지역을 두루 돌아보게 된다.


중심부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분리된 몰다비아 지역이 가장 가난한데 이곳의 테마는 자연과 와인이다. 국경을 넘어온 몰도바 와인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특히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식 만찬주로 쓰였다는 푸르카리 와인이 일품이다. 정말 최고다.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영향이 크다. 독일 작센지역에서 넘어온 귀족들이 쌓은 요새, 성당, 산성이 관전 포인트다. 몰다비아 지역에선 성을 거의 못 봤는데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으면 대형 건축물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상대적으로 루마니아 다른 지역에 비해 성 보유율이 높은 것 같다. 드라큘라성으로 알려진 브란성도 이곳에 있다.


왈라키아는 수도 부쿠레슈티가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서는 히잡을 쓴 여성도 제법 볼 수 있다. 부쿠레슈티가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1/6도 안 되는 브라쇼브보다(트란실바니아 도시) 더 세련되지 못해 보였는데, 이유가 궁금하다. 부쿠레슈티의 매력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호수다. 호반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루마니아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터키 잔재 혹은 오투 잔재


터키 잔재 혹은 ‘오스만튀르크’의 잔재, 줄여서 오투 잔재라고 할까? 일제 36년 동안 우리가 겪은 '일제 잔재'보다 10배 이상 더 긴 400여 년 동안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지배당했던 발칸 중남부 지역에는 터키 잔재 혹은 오투 잔재가 많았다. 이번 그리스 크루즈에서도 곳곳에서 이 터키잔재를 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브라쇼브 카페거리에서도 터키식 커피를 파는 카페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방법이 계속 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스만튀르크 때의 방식을 고수했다. 우리가 일제 36년 동안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는데, 400년 터키 잔재(오투 잔재)를 털어내는 일이 보통은 아니었을 듯.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잔재냐 아니면 오스만튀르크가 흡수한 것인가' 논쟁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도 뽕짝이 일본 엔카의 아류냐 아니면 엔카카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우리 근대가요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냐를 놓고 논쟁하는 것처럼 터키 잔재(오투 잔재) 논쟁이 있었다. 그리스의 기로스가 케밥의 아류냐 원조냐 하는 논쟁처럼.



# 호수가 아름다운 부쿠레슈티


여행지에 가면 도시를 읽어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 도서관에 가는 사람도 있고 무조건 높은 곳에 올라 조망하는 사람도 있다.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삶의 풍경을 읽어내는 사람도 있는데 나의 독법은 공원에 가서 그들처럼 멍 때리는 것이다. 시장과 마트에 가는 것도 좋아하긴 하지만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면서 동화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공원을 선호한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갔을 때 호수공원이 있길래 일부러 들러보았다. 독재자 차우체스쿠의 집도 이 호수 근처였다. 와보니 대사관저를 비롯해 고급 주택들이 호수 주변에 두루 분포하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강남에 해당하는 듯(위치상으로는 호북이다).


석촌호수와 마찬가지로 물길이었던 곳을 막아 호수로 만든 듯했는데 규모가 컸다. 석촌호수는 서호 동호 두 개의 호수로 구성되었는데, 여긴 그런 호수가 10개 이상 되는 듯. 석촌호수와 올림픽공원과 한강공원을 모두 이어놓은 정도의 규모. (도심 운하로 강과 연결된 것 같기도)


이 공원에 오기 전까지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슈티의 이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헝클어진 머리의 주근깨 투성이 금발 미인’이었다. 지금까지 본 동유럽 수도 중 가장 너저분했다. 빈부의 격차가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빈부가 뒤엉켜있는 느낌?


이 호수공원에서 부쿠레슈티의 매력을 보지 않았다면 그런 우중충한 부쿠레슈티의 인상만 가지고 갈 뻔했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는 부쿠레슈티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공원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읽어내는 최고의 교재다. 누구와 공원에 오는 지를 보면 공동체의 성격을 들여다볼 수 있고, 생활 스포츠의 발전 단계도 파악할 수 있고,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 무엇인지도 들을 수 있고, 두루 즐기는 간식이 무엇인지 맛볼 수 있다.


부쿠레슈티 호수 공원에서는 행복이 두루 읽혔다. 그 공원을 십분 활용하는 부쿠레슈티 시민들이 부러웠다. 다음에 다시 찾는다면 이 공원에서 멍 때리며 한나절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는데, 5월에 루마니아를 다시 가게 되었다. 기대된다.


주) '어른의 여행, 트래블러스랩'의 클럽 여행으로 '루마니아 스몰 럭셔리기행'이 5월1일~5월10일 진행됩니다. 트래블러스랩 여행클럽이 궁금하신 분들은 네이버 카페에서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늦겨울의 맛, 설국 온천기행을 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