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Aug 15. 2021

한국 차 문화가 제자리걸음인 이유

중국인차 전문가 정진단 선생이 본 한국 차 문화의 문제점

그동안 다양한 차의 유행이 지나갔지만, 한국의 차 문화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차에 대한 담론은 풍부한데 차를 즐기는 사람은 드물다. 커피를 그렇게 많이 마시고 커피숍이 한 집 건너 하나씩 있지만 차를 전문으로 하는 곳은 드물다. 중국 정부 공인 평차사인 정진단 선생으로부터 한국의 차 문화와 차 산업에 대해 쓴소리를 들어보았다. 2013년에 정리한 내용이지만 지금의 차 문화도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한국의 차 문화는 취향에 관한 한국인의 습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실질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즐기기보다 지식을 중요시 하고 취향을 통해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끼리끼리 문화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취향의 시대로 들어선 지금 취향의 세계에 나타나는 부조리를 한 번쯤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을의 한가운데에 방문한 천년 고찰 순천 선암사가 차향에 둘러싸였다. 남도의 구수한 발효차가 먼저 선을 보였다. 야생차가 유명한 선암사에서 이미 익숙해진 차향이다. 다음으로 중국 계화백차가 분위기를 이어갔다. 백차는 보이차 이후 중국에서 유행하는 차인데 그 은은함이 남도의 가을과 잘 어울렸다. 행사는 베트남 침향으로 향도(香道) 시범을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행사는 한국과 중국의 차 동호인들이 모여 서로의 차 문화를 감상하는 자리였다. 한국차문화협회 호남지부는 중국 이루차문화원 다롄지부 회원들에게 규방다례를 재연해주었고, 중국 측에서는 중국 차 연출 대회에서 1위를 한 이설 선생이 차 연출 시범으로 화답했다. 이설 선생과 함께 온 중국 차 동호인들은 전날 선암사 측으로부터 야생차를 대접받고 선방다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국과 중국의 차 문화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한국의 차 문화는 차 자체보다는 차를 마시는 형식에 주목했다. 선방다례가 소박한 형식으로 차를 마실 때 나누는 다담을 중시한 것과 달리 규방다례는 오방색 한복을 맞춰 입고 절도 있는 행다법을 보여주었다. 차를 내리고 대접하는 순서에 위아래가 명확했다. 전체적으로 예절을 중시했다.


반면 중국은 차의 맛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제대로 된 차 맛을 내려면 풍부한 지식과 정확한 손놀림이 필요하다. 중국은 차의 종류가 많아서 각각의 차에 맞는 방식으로 차를 내리고 물의 온도와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중국 차 시범을 보인 이설 선생은 차 맛을 잘 내기로 유명하다. 이번 행사 때도 중국 공기업의 고위직 등 많은 제자들이 이 선생을 따라 선암사까지 왔다. 



이날 한국 차와 중국 차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중국 정부 공인 평차사(차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차 전문가)인 정진단 선생이었다. 이설 선생의 선배로 중국문화원에서 중국 차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 정 선생은 그동안 한국의 차 동호인과 중국의 차 동호인 간 교류를 주선해왔다. 한국의 차 문화에도 정통한 정 선생으로부터 한국의 차 문화와 차 산업에 관한 쓴소리를 들어보았다. 정 선생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 차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몇 가지 의미 있는 지적을 해주었다.


보이차 열풍, 녹차 열풍, 허브차 열풍, 공차-버블티 열풍, 마테차 열풍 등 다양한 차의 유행이 지나가고 ‘오가다’와 같은 전통차 체인점이 생기기도 했지만 한국의 차 산업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한마디로 공전하고 있다. 유행이 지나간 자리는 스산해서 오히려 차 문화를 후퇴시켰다. 녹차는 공급 과잉이 되었고 보이차는 마니아 문화로 축소되었다.


정 선생의 지적은 한국 차 문화와 차 산업의 단점이면서 특징이다. 어떤 면에서는 장점일 수도 있다.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국이 차의 종주국이라는 점이다. 우리보다 차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차 문화가 보편적이다. 차 문화를 확산시키고 차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중국차 문화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 대략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다양한 녹차를 즐길 곳이 없다


한국에서 다양한 보이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은 있다. 보이차 외에 다양한 중국 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도 있다. 다양한 유럽 홍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도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녹차를 다양하게 마실 수 있는 찻집은 없다. 심지어 다양한 녹차가 준비되어 고를 수 있는 차 판매처도 없다. ‘오설록’과 같은 녹차 전문매장이 있지만 자체 생산한 녹차만 판매하기 때문에 다른 녹차는 맛볼 수 없다.


다양한 녹차를 고를 수 있는 판매점과 마실 수 있는 찻집이 없는 것은 녹차의 유통질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거래에 의존하는 소규모 다원이 많다 보니 알음알음으로 구입하는 수밖에 없다. 차 전시회나 차 축제 등에 가면 다양한 녹차를 맛볼 수 있지만 평상시에 고를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인사동의 차 판매점에도 녹차의 종류는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녹차는 유일하게 관세 장벽을 통해 보호받는 차다. 다른 발효차에 비해 관세가 월등히 높다. 정부가 관세 정책을 통해 녹차 산업을 육성하고 있고 지방정부도 많은 지원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이 녹차를 즐길 수 있는 기본 조건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유통질서의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녹차에 대한 표준이 없다


한국 녹차 중에는 명차라고 확인해줄 수 있는 차가 없다. 명차인지 감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별이 안 되는 것은 표준이 없기 때문이다. 표준이 있어야 정확한 감별을 할 수 있는데 녹차에 대한 표준이 없다. 표준이 없는 것은 표준을 못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녹차의 표준을 서로 동의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표준이 없으면 평가를 할 수 없고 평가를 할 수 없으면 명품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스스로 명품이라 주장하는 차만 있을 뿐이다.


중국 차 중에 자기 이름이 있는 차는 모두 표준이 있다. 표준이 있기 때문에 맛과 색과 향과 엽저(잎의 아랫부분)의 모양에 따라 평가를 할 수 있다. 중국의 차 생산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표준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표준이란 그 차가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와 같은 것으로 차 생산자들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 표준이 없다. ‘보성녹차’라는 말이 확인해주는 것은 생산 지역이 보성군이라는 것뿐이다.


표준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녹차는 자유분방하다. 물론 이것은 장점일 수도 있다. 다양한 녹차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의 녹차와 선방의 녹차가 다르고, 해마다 녹차 맛이 다르고, 다원마다 다르다. 그 다양성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장점이지만 해외 시장에서 보증된 명품으로 인정받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국 찻잎이 일본 찻잎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도 해외 진출이 미흡한 이유다.


제대로 된 발효차가 없다


한국 차 산업이 아직 초기 단계라는 것은 인정받는 발효차가 적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세계의 차 무역은 홍차·보이차 등 발효차가 주도한다. 그런데 한국의 발효차는 아직 팔지 못한 녹차를 장기 보관이 용이하도록 발효차로 처리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부 다원에서 중국 발효차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발효차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많지는 않다.


우리 발효차가 초보 단계라는 것은 대기업의 대표 상품에서도 나타난다. 아모레퍼시픽에서 운영하는 오설록에서 다양한 블렌딩 차가 나오지만 기본이 되는 발효차는 인도에서 수입한 것이다. 여기에 합성착향료를 넣어서 인공 향을 낸다. 아직 우리가 표준적인 발효차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이 글을 작성하던 시기에 비해 지금은 발효차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한국형 발효차'라고 얘기할 수 있는 다양하 차들이 등장했다.) 


접할 기회가 많지 않지만 찻자리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차 문화에 관용이 없다


정진단 선생은 한국의 차 문화를 한마디로 ‘차에 대해서 싸우는 문화’라고 정의했다. 많은 차 동호인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차 동호인 카페에서도 싸우고, 게시판에서도 싸우고, 블로그에서도 싸우고… 왜 그렇게 차에 대한 논쟁이 많은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몸과 마음을 이완하기 위해 마시는 차와 관련된 문화에 관용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차에 대한 논쟁이 많은 이유를 정 선생은 차를 파는 곳에서 차를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차를 파는 사람은 차에 대해 공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히려 이들이 더 차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정부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고 중국 차 전문가들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보이차 관련 정보를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차에 관해 다툼이 많은 것은 정확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소믈리에나 바리스타처럼 차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차를 내리는 차예사(다예사)와 차를 평가할 수 있는 심평원 평차원·평차사가 제도화되어 있다.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인받은 이들이 전문적인 판정을 내려주기 때문에 다툼이 적다. 반면 국내에는 이런 평가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새로운 세대의 차 문화가 없다


정진단 선생은 한국 녹차의 경쟁자는 중국의 발효차가 아니라 커피라고 충고했다. 커피 시장의 1%만 가져와도 한국 녹차 시장이 활성화되고 녹차 재배 농가들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음료 소비를 많이 하는 층을 잡아야 하는데 이에 대한 투자나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20~30대 소비자를 잡지 못하면 한국 녹차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한국 음료 시장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이미 대형마트에서 커피믹스 판매액이 쌀 판매액을 추월했다. 그런데 이 시장과 녹차 시장이 괴리되어 있다. 보통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커피에 대한 관심만큼 차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일부 젊은 소비자들이 커피에서 이탈해 유럽 홍차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정도다.


한국의 차 문화가 젊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차 문화를 주도하는 세대가 고연령층이기 때문이다. 정 선생은 자신이 만난 한국의 차 문화 관련 단체 회원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의 여성이었다면서, 젊은 세대가 차 문화를 지나간 전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즐길 수 있는 문화라고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차에 대해 배울 곳이 없다


한국에서는 차에 대한 예절을 가르치는 곳은 많지만 차 자체를 가르치는 곳은 적다는 것이 정 선생의 지적이다. 차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차 행위만 가르치는 것은 차를 오히려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를 마시고 차가 좋다는 것을 먼저 느껴야지 차 예절부터 배우면 거리감만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한국은 차에 대해서 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예절로 구분한다. 반면 중국은 차의 종류와 그 종류에 맞게 차 내리는 법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구분한다. 정 선생은 한국인은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차 자체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면 쉽게 차와 친해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은 대용차에 대한 부분이다. 이미 카멜리아-시넨시스 종의 찻잎으로 만드는 녹차·청차·백차·황차·홍차·흑차 등은 충분히 개발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다른 잎차와 줄기차, 뿌리차, 씨앗차 등 대용차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특히 다양한 기능이 증명되고 있어서 앞으로 개발의 여지가 크다. 한국인의 빠른 학습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분이다. 


문경찻사발 무혀문화재 김선식 명인이 물레를 돌려 찻사발의 모양을 잡고 있다. 문경 찻사발은 가장 한국적인 다기라는 평가를 득고 있다. 



다양한 다기가 없다


차 문화와 도자 산업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차 문화가 도자 산업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다양한 도자가 차 문화를 융성하게도 만든다. 여기에 비추어 한국의 차 산업과 도자 산업의 궁합을 보면 녹차와 녹차 다기의 조합만 발달해 있을 뿐 다른 조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제 경기도세계도자비엔날레의 판매장을 둘러봐도 녹차용 다기 일색이었다.


정진단 선생은 한국의 다기가 소박하고 담백한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편안한 어머니 같은 다기도 필요하지만 새침데기 젊은 여인과 같은 다기도 필요하고 선 굵은 아저씨 같은 다기도 필요하다며 다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좀 더 다양한 차를 즐긴다면 다기가 다양해질 것이라고 충고했다. 


다기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다. 보이차를 내릴 때 주로 사용하는 중국 자사호는 생존 작가의 작품이 수억 원을 호가하기도 한다. 차 문화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다기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다기 구입에 쏟는 돈도 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차 애호가들이 대부분 중국 다기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 도자 산업계가 관심을 가져볼 만한 영역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막국수는 영동식과 영서식이 다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