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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Aug 18. 2021

베트남 패망일에 탈출 못했던 한국인들의 이후 삶

'사돈의 나라' 베트남에 대해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몇 가지 사실

베트남전 최후 특파원이었던 안병찬 교수의 베트남전 당시 모습


내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현대사에서 베트남만큼 한국과 밀접한 인연을 맺은 나라도 드물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부대를 보낸 나라이고, 베트남이 개혁·개방(도이머이) 정책을 시행했을 때 가장 많은 기업을 진출시킨 나라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은 한류를 가장 뜨겁게 받아들인 나라, 한국에 많은 신부를 보내는 ‘사돈의 나라’이기도 하다.   


10여 년 전 베트남 전쟁 최후 특파원 출신인 안병찬 교수(언론인권센터 명예이사장)와 함께 베트남 현지를 돌아본 적이 있다(안 교수는 이때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자임하시고 다양한 취재원을 소개해 주셨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10월부터 1973년 7월까지 <한국일보> 사이공(현 호찌민)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안 교수는 남베트남 패망 직전인 1975년 봄 다시 기동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남베트남의 멸망을 현장에서 취재한 바 있다.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그가 미국 대사관에서 철수 헬기를 함께 타고 탈출한 뒤 7시간 후에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대통령궁(독립궁) 철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었지만 베트남에 대한 안 교수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도이머이 정책 실행 후 베트남이 개방에 나서자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공산화 이후 베트남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르포 기사들을 내보냈다. 이후에도 매년 남베트남 패망일이자 베트남 통일이 완결된 날인 ‘바므이땅뜨(4월30일)’에 맞춰 베트남을 찾아 변화하는 베트남을 살폈다. 


베트남에 도착하기 직전, 베트남항공 비행기 안에서 안병찬 교수는 베트남에 대한 시선을 바꿀 것을 주문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 통일전쟁이다. 이제 우리의 상대는 부정과 부패로 망한 남베트남이 아니라, 단결과 인내로 분열된 나라를 통일한 북베트남이다.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미국과의 통일전쟁, 중국과의 국경분쟁에 모두 승리했던 이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와 호찌민 중심가(예전 사이공 중심가)에서 월남 패망 직전 그가 마지막 돌았던 취재 루트를 함께 돌았다. 폭풍 전야처럼 아무도 없었던 중심가를 지프차로 가로지르며 여기저기 마지막 모습을 '칼라'로 찍었던 그는 월남 패망 7시간 전에 사이공을 벗어났다. 그가 철수 헬기를 탔던 미국대사관은 영사관으로 바뀌어 계속 운영되고 있었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도 등장하는 구 미국대사관 철문이 그를 상념에 젖게 했다.  



한국 교과서 속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대척점에 있는 국가이자 민족이었다. 교과서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아랍에 포위된 대신 국민의 애국심 덕분에 강국으로 성장한 나라였다면, 베트남은 부정과 부패로 얼룩져 망한 나라였다. 유대인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면, 보트 피플로 세계를 유랑하는 베트남인들은 2류 민족이었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배웠고, 그 결과 베트남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해 있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실익을 챙기고도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는 무심했으며, 베트남 정부로부터 각종 특혜를 얻어 경제 개혁과 개방의 성과를 독차지하고도 사회적 기여에 소홀했다. 베트남 신부들을 불러들여와 농촌 총각 문제를 해결했으면서 이들을 구박하는 일도 다반사였다(개인적으로 한국 현대사의 스트레스를 풀었던 나라가 베트남이 아니었나 싶다). 


안 교수는 이 방문에 젊은 문화기획자 이한호씨(쥬스컴퍼니 대표)를 대동했다. 베트남과 한국 간 문화교류 사업을 기획 중인 이씨는 “한류로 우리 문화가 베트남에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베트남 문화를 찾아 한국과 베트남 양쪽에 문화아카데미를 세우려고 베트남을 탐사 중이다”라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된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인연을 맺은 1세대, 개혁·개방 정책 실행 이후 진출한 2세대, 그리고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언어와 문화를 익히고 찾는 신세대인 3세대. 이들을 두루 만나 베트남과 베트남인에 대한 생각,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콘티넨탈 하노이 호텔 숙소에 베트남 전쟁 때부터 베트남에서 사업을 해왔다는 이순흥씨와 이영진씨가 찾아왔다. 안병찬 박사는 이들을 ‘도깨비들’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에서 단맛, 쓴맛, 신맛, 짠맛 다 보고도 베트남을 떠나지 않고 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셋은 남베트남 패망 직전 베트남을 탈출하던 날의 기억을 시작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교민 회장이었던 이순흥씨는 줄을 잘못 서서 베트남을 탈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대영 주베트남 공사와 700여 명의 교민과 함께 미국 대사관에서 기다렸는데 헬기가 오지 않아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탈출이 늦어진 것은 200만 달러 상당의 비철과 고철을 포기하지 못해서였다. 반면 형과 함께 사업을 하던 이영진씨는 수십만 달러어치 건설 기자재를 포기하고 종전 직전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순흥씨는 구속된 한국 공관원들의 옥바라지를 하고 1980년 함께 귀국했다. 그는 “귀국 보고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며 반공교육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비난했던 나라에 돌아와 그 나라 여성과 재혼까지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베트남은 이제 더 이상 기회의 땅이라 하기 어렵지만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한국으로 급히 탈출하던 당시 안 교수에게 취재 때 쓰라며 지프차를 넘겨줬던 이영진씨 역시 일종의 귀소본능이 작동해 베트남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은 한번 인연을 맺으면 다시 오게 되어 있다. 베트남에서 돌아와 형과 함께 중동으로 나가 사업을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해외 사업에 눈뜬 많은 사업가들이 우리처럼 중동에 진출했다. 그래도 베트남이 그리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이들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2세대에 해당하는 기업가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베트남에는 한국 기업 3000여 개가 진출해 베트남인 60만여 명을 직접 고용하고 있다(2012년 통계). 2011년 삼성전자가 베트남에서 수출한 금액은 68억 달러로 베트남 전체 수출액의 7%에 해당한다. 2012년에는 100억 달러 정도로 전체 수출액의 약 10%를 차지했다. 한국 기업은 베트남 경제의 거시경제 지표를 받치고 있다. 


이들 2세대가 1세대와 다른 점은 베트남인을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었다. 1세대 교민들은 베트남인에 대해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고 자존심이 높다’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배신을 잘하고 은혜를 모르며 사과할 줄 모른다’라는 부정적 의견을 덧붙이곤 했다. 그러나 2세대는 달랐다. 베트남에서 10년 넘게 사업을 하고 있는 프라임건설의 유명호 대표는 “베트남 기업과 거래할 때 이들이 계약서에 사인한 후 이를 어기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계약 금액 중 1원도 오차 없이 지켰다”라고 말했다. 


베트남에 온 한국 관광객들은 길을 건널 때 가장 크게 어려움을 겪는다.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보행자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리고 신호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무질서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일정한 법칙은 있다. 한국타워크레인 권영신 베트남법인장은 “베트남 사람들이 오토바이 탈 때 헬멧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정부가 어느 날부터 헬멧을 쓰지 않으면 단속하겠다고 했다. 그 전날까지 헬멧을 쓰는 사람이 1%도 안 됐는데 단속을 시작한 날부터 99%가 헬멧을 썼다”라고 말했다. 


베트남에서 만난 교민 중 베트남인을 가장 높이 평가했던 사람은 국내에서 여러 개의 대기업을 소유하고 베트남에서도 가장 크게 사업을 했던 한 원로 기업가였다. 이름을 밝히기 원치 않았던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다(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근면하고 머리 좋고 자존심 있고 끈기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무시하고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면 백전백패한다. 한국 기업가들이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베트남 진출 3세대는 베트남어에 능통하고 베트남 음식 등 현지 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세대라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이가 난다. 1994년 3월 어학연수로 베트남에 온 뒤 하노이 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홍선 HSDC 대표가 대표적이다. 베트남 유학 1세대인 그는 주베트남 대사관에서 근무한 뒤 한국상공연합회(KORCHAM) 사무국장을 5년 동안 맡았다.


홍 대표는 3년 전 안병찬 박사와 베트남 전 부주석 응웬 틴 빙의 인터뷰를 주선한 일이 있다. 16세 때부터 프랑스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외교장관 자격으로 파리 휴전협상을 주도한 응웬 틴 빙은 당시 특파원들 사이에서 ‘마담 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전설적인 혁명가였다. 홍 대표가 노기자와 노혁명가의 인터뷰를 주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나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응웬 틴 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였다. 


홍 대표는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다. 사돈이면 어렵고 예의를 갖춰야 하는데 신부를 사 온 곳으로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베트남을 동북아의 일원으로 봐야 한다. 몽고점, 유교 문화권, 쌀 주식, 높은 교육열 등 우리와 유사점이 너무나 많다. 동북아 패러다임으로 보면 베트남이 좀 더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 대표와 같은 1세대 유학생으로 동문수학했던 구수정 박사는 한국과 베트남 간 비즈니스 동반자 관계를 도모하는 홍 대표와는 또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베트남과 한국이 정상적인 동반자 관계를 맺으려면 과거사를 반성해야 한다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조사했다. 10년 넘게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고 다닌 구 박사는 요즘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을 만들어 공정무역·공정여행을 주선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 정부는 민감한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정책을 쓰고 있다. <베트남 교민신문> 김종각 대표는 “베트남 정부의 태도는 실리적이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굳이 꺼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에서 베트남 신부가 폭행당해 사망했다는 소식이 와도 외교 문제로 확대시키지 않고 개인 문제로 치환해 무마시킨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들이 유예 시간을 줄지 장담할 수 없다.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베트남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베트남을 아는 것이다. <교민신문> 최덕영 부대표는 “베트남인들은 김우중·정주영 등 한국 기업가들의 자서전을 번역해서 읽는다. 그들은 한국의 경제발전 모형 등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베트남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베트남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점이다. 일본과 밀접한 타이, 중국과 밀접한 미얀마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도 베트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베트남 방문 말미, 베트남의 한류팬 13명과 숙소 근처에서 ‘번개 미팅’을 했다. 트위터를 통해 기자가 베트남에 취재 온 사실을 안 이들이 요청해 이뤄진 만남이었다. 동행한 안병찬 교수가 베트남 최고의 민요·동요 작곡가인 찐 꽁 손을 네 차례나 인터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은 찐 꽁 손이 작곡한 ‘나는 작은 장미가 될래요’를 합창해주었다. 이들은 또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에 쓰라며 베트남어로 쓰인 책 30여 권을 전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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