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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07. 2020

헌 책과 헌 캐리어를 위한 여행 실험

지난 1년 동안 '캐리어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 해 서울시 공공도서관에서 증발하는 헌 책이 20만 권 안팎이라고 한다. 그중 얼마는 기증될 것이고 그중 얼마는 헌 책 중개인에게 넘어갈 것이고 그중 얼마는 폐기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20만 권 정도가 서류상 ‘최종 처리’ 된다는 것이고 이 책의 행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나마 책은 부활의 여지라도 있다. 여행용 캐리어는 이마저도 없다. 이들은 다른 플라스틱과 금속과 천과 마찬가지로 ‘최종 처리’된다. 세계를 누볐던 캐리어의 여행은 분리수거장 앞에서 끝이 난다. 독서와 여행은 현대인의 양대 취미로 꼽히는데 역설적으로 이 취미가 활발해질수록 버려지는 책과 캐리어는 늘어난다.      


이 둘을 만나게 하면 어떨까? 캐리어도서관의 시작은 헌 책과 헌 캐리어의 부활을 위한 고민에서 시작했다. 사실 헌 책에 대한 고민은 오래되었다. 헌 책을 모아 책이 꼭 필요한 곳에 전달한다는 ‘기적의 책꽂이’ 프로젝트를 2011년~2012년 진행해서 약 11만 권의 책을 모아 전국  100여 곳의 이상의 장소에 전달했다. 2013년에는 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황폐해진 강정마을에 평화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돕기 위한 ‘강정 10만대권’ 프로젝트를 진행해 4만여 권의 책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떨어졌다. 책을 옮기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공공시설을 서울시가 공공 헌책방(서울책보고)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자문하기는 했지만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헌 책의 무거움에 압도당한 경험 때문이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람의 무게만큼 어깨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때 생각했던 것이 바퀴 달린 작은 책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책을 옮기기 수월하도록 말이다. 그러다 동네 분리수거장의 버려진 캐리어를 보고 유레카를 외쳤다. ‘저거다, 캐리어를 이동 책장으로 쓰자!’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책이 더 버려지기 전에, 캐리어가 더 버려지기 전에 시작하자! 그렇게 해서 캐리어도서관이 시작되었다.      


요즘도 동네 아파트단지를 산책할 때면 내 눈은 레이더처럼 분리수거장을 훑는다. 손잡이가 고장 났거나 바퀴가 삐걱거리거나 천이 더러워졌다고 표면에 금이 갔다고 여행에서 배제된, 버려진 캐리어를 구출하기 위해서다. 사실 왜 버려졌는지 모를 멀쩡한 캐리어가 더 많다. 캐리어를 수거하면 집에 와서 걸레질 인공호흡으로 되살린다.      


‘바퀴 달린 책장’인 캐리어는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일단 책을 기증하는 사람이 캐리어에 책을 넣어 끌고 오면 손에 들고 올 때보다 몇 배 더 많은 책을 가져올 수 있다. 기증받을 곳에 책을 옮길 때도 책캐리어 그대로 옮기니 작업이 훨씬 수월했다. 무엇보다 캐리어는 하나하나가 그대로 책장으로 쓰일 수 있어서 좋았다. 책캐리어 하나가 그대로 기증자 이름으로 된 도서관이 되었다.    


  

영등포 서울하우징랩에서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해서 3월부터 캐리어도서관 시즌1을 시작했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때라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책캐리어가 각지에서 몰려왔다. 욕지도 무무빵집과 평창 산너미목장 그리고 태안 자연동화에 100여 개의 책캐리어를 전달하고도 캐리어가 150여 개나 남아서 시즌2 장소인 문화역서울284에 옮겼다.    

  

문화역서울284에서 두 달간 진행된 <여행의 새발견> 전에 전시되었던 책캐리어는 시즌3 장소인 은평구 꿈담은작은도서관으로 옮겨졌다. 여기서부터 라이나전성기재단이 책과 캐리어를 기증하려는 사람을 위해 착불택배 비용을 부담해 주어서 책과 캐리어가 전국에서 들어왔다. 너무 많이 와서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할 만큼 많이 왔다.  


책캐리어를 핑계 삼아 여행도 만들었다. 캐리어도서관 자원봉사자들과 욕지도 무무빵집, 평창 산너미목장, 문경 단산 그리고 울릉도에 책캐리어를 옮기며 겸사겸사 여행도 곁들였다. 의미 있는 일에 재미를 더하니 함께 하는 사람들도 무척 즐거워했다. 가져간 책으로 여행지에서 망중한의 독서를 즐길 수도 있었다.      


여름에는 대이작도 앞 풀등과 무인도인 하공경도에서 캐리어도서관 패션쇼(passion show)도 벌였다. 대이작도 앞 풀등은 모래섬이다. 물이 빠지는 간조 때 3~5시간 정도 드러나는데 넓이가 30만 평이 넘는다. 여기서 ‘10분 도서관 퍼포먼스’를 벌였다(원래는 100분이 목표였다). 책캐리어를 가지고 가서 10분 동안 도서관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세상 모든 곳이 도서관이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하공경도에는 ‘무인도 유인 도서관’을 구축하기 위해 책캐리어를 놓고 왔다.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캐리어를 발견했는데 열어보니 라면 3봉과 버너 그리고 코펠이 있었다. 라면 유통기한이 6개월 정도 지나서 더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끓여 먹었다. 대신 낚시꾼인지 나물꾼(하공경도에는 취나물이 많이 난다)인지 아니면 탐험가인지 모를 캐리어 주인을 위해 책캐리어를 가져다 두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캐리어가 사람들을 무인도로 이끌어주는 ‘유인 도서관’이 되어주길 기원했다.      



캐리어는 하나의 우주였다. 책만 담기 심심해서 음악 CD를 담아보니 공연장이 되었다. 영화 DVD로 영화관도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상상력이 점점 확장되었다. 약사단체에서 홍보물로 받은 볼펜을 모아 ‘문구캐리어’도 만들어 주었다. 캐리어 도서관을 구축하는 일은 우주를 담아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19로 세상이 멈췄지만 캐리어도서관을 통해 상상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책캐리어를 기증해 달라는 곳이 해외에도 있다. 그중 여행과 연결될 수 있는 곳을 먼저 골랐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근처의 학교, 몽골의 테를지국립공원의 학교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자원봉사를 했던 네팔의 아루카루카 마을에 책캐리어를 보내기 위해 책과 캐리어를 모으고 있다. 이대로라면 세상에서 제일 큰 도서관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장서 수가 1700만 권~1800만 권 정도 되는데 이를 능가하는 도서관을,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넓은 캐리어도서관을 만들고 싶어 졌다.      


‘의미 있는 일을 재미있게, 재미있는 일은 의미를 찾아서’ 하면 오래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평소 소신이다. 세상에 영원한 파티가 없듯이 영원히 재밌는 것은 없다. 영원한 재미를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다. 캐리어도서관은 그런 의미에서 ‘국내 1호 여행감독’을 자처한 나에게 영원한 재미를 보장하는 여행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언젠가 하늘길이 다시 열리면 이 책캐리어와 함께 세상을 여행할 것이다. 책캐리어에 우주를 담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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