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12. 2020

킬리만자로와 잔지바르는 아프리카의 보석

킬리만자로와 잔지바르는 '화이트 아프리카'의 방점이다


마사이마라가 거대한 동물원이라면 킬리만자로산은 거대한 식물원이었다. 이 웅장한 식물원의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은 바로 바오밥나무다. 탄자니아 모시에서 킬리만자로산으로 가는 길에 거대한 바오밥나무를 여럿 볼 수 있는데 그중에는 둘레가 40걸음이나 되는 큰 것도 있다. 수령이 수천 년은 되어 보이는 이런 오래된 바오밥나무가 마을의 당산나무처럼 서 있어서 일행은 차를 멈추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발 5895m인 킬리만자로는 허가를 받고 등록하고 나서야 오를 수 있는 산이다. 등산로 입구인 마랑구 게이트는 해발 1970m인데, 보통 정상을 다녀오는 데에 5박6일 정도 일정을 잡는다. 일행은 해발 2700m에 있는 만다라 대피소까지 왕복 16㎞를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킬리만자로에서 해발 1800~2700m 지역은 열대우림이다. 보통 고산 트레킹에는 자외선을 방지하기 위해 선글라스가 필수인데, 이곳의 원시림을 걸을 때는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었다. 만다라 대피소 다음의 호쿰보 대피소(해발 3800m)까지는 관목과 초지의 길이다.   

  

킬리만자로산은 그저 바라보기만 해서는 그 매력을 알 수 없다. 꼭 걸어봐야 한다. 해발 2700m인 만다라 대피소 정도는 올라가야 킬리만자로의 시선으로 아프리카 평원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이 높이면 고소증이 오는데 등산로를 길게 낸 대신 언덕의 기울기를 가파르지 않게 해서 일반인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우리 일행에는 초등학생도 있었는데 둘 다 수월하게 올랐다.   


킬리만자로 트레킹은 현지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흥이 많고 유머가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배려하는 그들과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킬리만자로 트레킹은 네팔의 히말라야 트레킹과 여러모로 닮았다. 짐을 나르는 포터들은 우리보다 훨씬 큰 짐을 지고도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오른다. 가이드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이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어느새 만다라 대피소에 올라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다라 대피소는 별을 볼 수 있는 명소다. 히말라야의 산장과 몽골의 초원 그리고 캄차카반도에서도 많은 별을 보았지만 킬리만자로에서 본 별과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마치 우주의 어느 곳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SF 영화를 보면 카메라가 별에서 줌 아웃되어 지상으로 향하곤 하는데 그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가깝게 느껴지는 별, 멀리 아득히 보이는 별 등 별과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별을 많이 볼 수 있는 곳, 별이 밝게 보이는 곳, 혹은 크게 보이는 곳이 있었지만 이곳처럼 별의 공간감이 확실한 곳은 없었다.     

킬리만자로산의 동쪽 사면에 있는 만다라 대피소는 해돋이 명소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돋이를 보았다. 해돋이를 본 뒤에는 분화구도 돌아보았는데 전날 오른 곳과는 식생이 달랐다. 관목과 초지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시야가 시원해 정상부를 관망하기 좋았다. 그리고 들꽃이 너무나 예뻐서 킬리만자로를 거대한 식물원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준비할 때는 추위에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 날씨는 위도만큼 고도의 영향이 크다. 고도가 높은 곳은 일교차가 크다. 그래서 밤과 새벽에는 상당히 춥다. 일출을 보러 올라가는 언덕의 해발은 3000m가 넘는다. 대피소는 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기능 좋은 침낭이나 핫팩 등을 준비해야 한다.     


사실 이번 아프리카 여행 내내 우리 일행은 추위와 싸워야 했다. 여행지가 대부분 적도 근처인데, 일사병이 아니라 감기 몸살을 걱정했다. 패딩과 바람막이는 필수품이었다. 해발 2200m인 마사이마라 캠프에서 캠프파이어를 하자 사람들이 불 옆에 모여들었다. 그보다 고도가 더 높은 마사이마라의 로지에는 담요 안에 넣고 잘 수 있는 유단포(보온 물주머니)가 방마다 배치되어 있었다.     


적도는 추웠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나이로비(해발 1600m)나 아디스아바바 (해발 2400m)에서는 긴팔 옷은 당연했고 점퍼를 입은 사람도 흔했다. 간혹 털모자를 쓴 사람도 있었다. 일교차가 매우 커서 두꺼운 옷은 필수였다. 시베리아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 열기구 파일럿을 하는 세르게이와 그의 아내 엘레나도 7월과 8월에 추위 때문에 혼이 났다고 말할 정도다. 마사이족이 담요로 온몸을 친친 감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 일행이 마지막으로 간 잔지바르 섬은 ‘화이트 아프리카’의 백미로 꼽을 수 있는 곳이다. 잔지바르는 마지막 노예무역 항구로 유명한데, 노예들의 불행이 시작되던 이곳이 지극한 행복을 주는 휴양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많은 여행가들이 최고의 여행지로 꼽는 곳 중의 한 곳인데, 압도적인 풍광과 억압의 역사가 뒤섞인 이곳에서 다양한 감성의 자극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이로비의 카렌 블릭센에게서 시작된 ‘화이트 아프리카’는 잔지바르에서 프레디 머큐리로 마무리될 뻔했는데,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그룹 퀸의 리드보컬인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것 같은데,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을 부끄러워하고 인종차별주의자를 위해 공연했던 프레디 머큐리를 ‘싱겁게’ 추모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하나 볼 수 없었다. 백인 몇몇만 그의 생가 터를 기웃거릴 뿐 추모 열기를 느낄 수 없었다. 프레디 머큐리 이름을 딴 바에서는 다른 음악을 틀었다. 우리가 요청한 뒤에야 겨우 그의 음악 몇 곡을 들려주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프레디 머큐리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었다. ‘화이트 아프리카’를 ‘블랙 아프리카’로 되돌리면서 아프리카에서는 백인들이 붙인 이름을 스와힐리어로 되돌렸는데 리빙스턴만은 예외라고 했다. 그가 노예해방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붙인 빅토리아 폭포는 그대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잔지바르에서 노예 매매가 이뤄지던 곳에 세워진 성공회 성당에도 그의 무덤에서 자란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가 아직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은 식민지를 지배할 때 대륙의 숨통을 쥘 수 있는 섬을 주로 정복했는데 잔지바르도 그런 곳이다. 당시 인도계 영국인들도 많이 정착했으며 프레디 머큐리가 바로 그들의 후손이다. 노예무역을 독점하려 했던 아랍의 오만 왕조도 그런 이유로 이곳을 공략했다. 아랍인들은 이곳에 이슬람교를 남겨두었다. 탄자니아 본토는 기독교인이 많지만 잔지바르는 대부분 무슬림이었다. 무슬림들은 잔지바르에 수많은 이슬람 유적을 남겼고 인도계 영국인들은 이곳을 향신료(특히 정향)의 고향으로 키웠다. 영화 〈간디〉의 주인공 벤 킹슬리의 할아버지도 그런 잔지바르의 향신료 무역상 중 한 명이다.     



이런 다양한 문화가 빚어낸 독특한 풍광을 볼 수 있는 잔지바르는 고급 휴양도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세월의 무게를 묵묵히 받아낸 낡음에는 추레함이 없었다. 잔지바르의 중심인 스톤타운의 골목 사진을 찍어본 일행은 “쿠바와 비슷한 느낌이 난다”라고 평했다. 섬 북쪽의 능웨 해변은 백사장이 곱고 바다색이 예뻐 휴양지로 이름나 있다. 섬 동쪽의 파제 해변은 해양 스포츠의 성지여서 젊은이들이 다양한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쪽에 자리 잡은 스톤타운은 석양이 유명했다.     


잔지바르에서는 보통 ‘프리즌 아일랜드’로 알려진 창구 섬에 당일로 들어갔다 오거나 향신료 농장에 다녀오는 일정을 진행한다. 이 아름다운 섬이 리조트가 아니라 감옥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한 창구 섬은 인도양 섬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얕고 잔잔한 연푸른 바다가 섬 주변으로 펼쳐진다. 잔지바르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는 여행자라면 능웨 해변을 추천한다. 고급 리조트가 몰려있는 곳인데 일정이 촉박해 나는 가보지 못했다.


    

잔지바르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도시지만 잔지바르의 주인은 아프리카 현지인이었다. 야시장에서든 해변에서든 현지인들은 주인답게 자신들의 도시를 즐겼다. 특히 석양에 펼쳐지는 아이들의 다이빙 놀이가 인상적이었다. 진한 생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서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스톤타운의 여행자들은 현지인들의 즐거움과 흥에 기대고 동화되어 행복을 느끼게 된다.     


잔지바르에서는 아프리카의 새로운 색깔을 보기도 했다. 바로 중국인들이 몰고 온 ‘골드 아프리카’ 바람이다. 아프리카 여행 내내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나이로비 파라다이스 호텔에서는 현지인 공연자들이 중국 관광객들을 위해 등려군(덩리쥔)의 ‘첨밀밀’ 등 중국 유행가를 불러주기도 했다(테이블의 대부분은 중국 관광객이었다). 이런 중국 단체 관광객들은 ‘전설’을 몰고 다닌다. 나이바샤 호수에서는 불과 일주일 전 한 중국인 관광객이 금지 구역에 갔다가 하마에 물려 죽는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는 한 해 전에 중국인 신혼부부가 가이드 말을 듣지 않고 위험 행동을 하다 사자에 물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잔지바르에서도 ‘골드 아프리카’의 징후는 강했다. 중국 자본이 아프리카에 깊이 뿌리 박히고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의 운전을 맡아주었던 안토니 씨는 “잔지바르 사람들은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중국 기업이 축구 경기장을 지어주었다. 지금 차 밖으로 보이는 공사장 중 높은 건물은 전부 중국인들이 짓는 곳이다”라고 귀띔해주었다. 잔지바르의 아름다운 석양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궁금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프리카 기행 1편,  '화이트 아프리카’를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