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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Dec 11. 2020

아프리카 기행 1편,  '화이트 아프리카’를 보다

비록 이방인을 위한 가공된 아프리카였지만 진한 생의 에너지를 느꼈다

  

카렌 블릭센, 어니스트 헤밍웨이, 데이비드 리빙스턴, 프레디 머큐리…. 〈시사IN〉에서 진행했던 ‘나의 첫 아프리카 여행’의 여정 중 마주친 이름들이다. 우리가 여행한 아프리카는 날것 그대로이기보다 백인들이 발견하고 개발하고 착취했던 ‘화이트 아프리카’에 가까웠다. 가장 평균적인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는 케냐와 탄자니아가 특히 그렇다.     


비행기에서부터 그 징후는 나타났다. 인천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행 항공기에는 흑인 일색이었는데, 아디스아바바발 케냐 나이로비행 항공기로 옮겨 타자 백인이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달랐다. 선입관 때문인지 그들이 평범한 관광객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연구하는 동물학자나 지질학자로 보였다. 이 여행을 함께 기획한 디스이즈아프리카의 박다애 대표는 “만약 아프리카 54개국을 각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면, 가장 먼저 케냐와 탄자니아를 맛보라고 권하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그 접시에 담긴 음식은 고급 레스토랑의 양식이었다.  

   

‘화이트 아프리카’는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날것 그대로의 아프리카를 감당할 맷집이 없기 때문이다. 황열병 주사를 맞고 말라리아 약을 먹어도 아프리카는 여전히 불안한 곳이다. 하루 먼저 나이로비에 도착했던 한 일행은 불안해서 호텔 밖으로 1m도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야생의 아프리카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바로 ‘화이트 아프리카’를 뒤쫓는 길이다.     


나이로비는 경계와 구분의 도시였다. 도시 밖에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있다면 도시 안에는 ‘부자 보호구역’이 있다. 부자와 백인들이 이용하는 시설은 담장 위로 철책이 둘러쳐져 있어 마치 군사시설처럼 보였다. 호텔이나 레스토랑도 철저한 경계를 받는다. 호텔에 들어갈 때는 보안 검색까지 해야 하는데 외국인이 아니라 주로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다.     



‘화이트 아프리카’의 여정에서 처음 마주치는 이름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 카렌 블릭센이다.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1985년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출연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녀의 저택이었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아프리카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후 여행 일정과 코스는 ‘카렌 블릭센 로드’라 할 만했다. ‘그녀가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도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초원과 정글 속으로 적정 도시를 옮겨두었다. 그들이 옮긴 도시를 따라 우리는 케냐와 탄자니아를 둘러보게 된다. 카렌 블릭센처럼 글램핑 텐트에서 숙박하고 얼룩말이 뛰어노는 초원에서 정찬을 즐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퍼드와 메릴 스트립은 경비행기를 타고 초원과 호수를 가로지르는데, 우리는 대신 열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물소 떼를 관찰했다.     


‘화이트 아프리카’는 마사이마라 초원에서 시작되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펜이 지나간 킬리만자로 능선을 지나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이 울리는 잔지바르 해변까지 이어진다. 백인들이 재발견하고 재해석한 아프리카를 보게 되고 백인들에게 최적화된 숙박과 식사와 운송을 경험하게 된다. 박제된 아프리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나이로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가는 나이바샤 호수는 해발 1884m에 자리 잡은 늪지로 둘러싸여 있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 본격 사파리(아프리카에서는 ‘게임 드라이브’라고 부른다)를 하기 전에 들르는 곳이라 일종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강력하다. 나이바샤 호수 사파리는 ‘아프리카는 흉내 내는 것이 없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인상을 확실히 심어준다.     


나이바샤 호수 사파리는 보트를 타고 호수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호수 한쪽에 있는 반달섬에 내려서 초식동물들을 관찰하고 돌아오는 코스다. 사파리의 첫 주인공은 하마다. 호수 표면에 코와 눈만 드러내고 느긋하게 햇살을 즐기는 하마 가족을 볼 수 있다. 인상과 달리 하마는 그리 온순한 동물이 아니다. 조심해야 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원작을 쓰고 그레고리 펙, 수전 헤이워드, 에바 가드너 등 당대의 스타가 출연했던 영화 〈킬리만자로의 눈〉에 보면 하마가 흑인 가이드를 무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종종 사고를 일으킨다.     


나이바샤 호수에서 하마 다음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것은 물 위로 드러난 하얀 고사목들이다. 바람 세찬 산 정상에 있어야 할 고사목이 호수 안에 있어서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빈집 지붕과 함께 이런 고사목이 군데군데 서 있어서 마치 침수된 곳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건기인데도 수위가 높았다. 고사목은 사람이 살았던 곳에 물이 차면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고사목을 얻은 대신 잃은 것도 있다. 원래 나이바샤 호수의 명물은 홍학(플라밍고)이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도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가 경비행기를 타고 홍학 떼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먹이가 줄자 홍학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이바샤 호수에서는 다양한 새를 관찰할 수 있다.     



호수 안에 있는 반달섬에서는 얼룩말·기린·아프리카물소 같은 초식동물을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다. 가이드를 따라 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동물을 관찰하니까 꼭 동물원 우리 안에 들어온 것 같다. 반달섬 언덕 위에서는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평원과 그 뒤의 산을 볼 수 있어서 ‘눈맛’이 시원하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예고편이다. 본편은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 경험하게 된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주로 비포장도로다. 험한 길을 몇 시간 달려야 하는데 마사이족 거주 지역을 가로질러 간다. 여기서 재미있는 장면을 마주친다. 도로 곳곳에 장대로 길을 막고 통행세를 받는 마사이족을 만나게 된다. 비가 와서 훼손된 도로에 우회로를 만들어놓고 돈을 받기도 하지만 그냥 막아놓은 곳도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사파리 자동차의 운전사들이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그들과 정답게 환담하면서 통행세를 흔쾌히 낸다는 것이다.     


나이로비에서 6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은 서울시의 2.5배 면적에 달할 만큼 큰 곳이다. 이곳은 케냐의 세렝게티 국립공원과 서로 맞닿아 있다. 아프리카물소들은 좋은 풀을 찾아 마사이마라와 세렝게티 사이를 옮겨 다닌다. 10월에는 마사이마라 쪽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물소 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노리는 다양한 육식동물도 덤으로 볼 수 있다. 코끼리·기린·얼룩말 그리고 임팔라·가젤 등 각종 영양류 동물과 원숭이·토끼 등 다양한 동물들을 초원에서 볼 수 있다.   


  


사파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처음에는 모든 동물이 신기해 보이지만 이내 시들해진다. 나중에는 초식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귀한 육식동물을 찾게 된다. 그런데 육식동물은 대부분 야행성이라 낮에 잠을 잔다(밤에는 사파리가 금지되어 있다). 사자나 표범 같은 육식동물은 잠을 자고 있는 모습밖에 볼 수 없고 움직여도 자다가 기지개를 켜는 정도다.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역동적인 사냥 장면을 볼 확률은 로또에 당첨될 확률에 가깝다.     


초원을 지배하는 법칙은 약육강식이 아니었다. 육식동물이 다들 잠을 자는데 초식동물이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육식동물은 먹을 만큼만 사냥하고 초식동물은 먹힐 녀석들만 먹히니, 약한 동물은 약한 대로 한가했고 강한 동물은 강한 대로 한가했다. 초원에서는 거대한 ‘멍 때리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사자의 잠멍, 기린의 하늘멍, 아프리카물소의 풀멍, 악어의 물멍, 하마의 하품멍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멍해 있다.     


동물들은 어느 것도 뛰어다니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분주했다. 사륜구동 사파리 차를 타고 서로 무전을 주고받으며 구경거리를 찾아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정신없이 옮겨 다녔다. 그 모습이 익숙한 듯 동물들은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는데 사람은 그 동물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쫓아다니니 동물들이 조금 지겨워져, 우리도 이곳의 동물처럼 ‘멍 때리는’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팡이를 짚고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마사이족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마사이족은 그런 우리를 관조하듯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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