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지옥에서 맛 본 일주일 간의 천국
파업 중간에, 무기정직 징계를 받은 상황에서, 초호화 리조트에 다녀왔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2007년 4월, 나의 상황은 암담했다. 아파트 전세금은 6000만 원이 올라 있었다. 전세금이 오를 특별할 이유는 없었다. 정부의 실패한 부동산 정책을 처절하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파업이 4개월째 지속되어 월급도 못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내는 이런 상황을 예측 못하고 육아휴직 중이었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편집권 독립’을 내건 기자들의 파업도 사실상 소강상태였다. ‘시사저널 사태’가 〈PD수첩〉에 방영되는 등 이슈화되자 회사는 협상을 하자고 했다. 그러나 협상 기간에 언론의 관심이 뜸해지자 태도를 돌변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편집권은 경영권이므로 대표이사에게 있고,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는 파업은 불법 파업이다’라고 주장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눈을 붙드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KBS 〈퀴즈 대한민국〉이었다. 최대 상금이 6000만 원이었다. 기자에게 필요한 6000만 원과 정확히 일치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고 두꺼운 상식책을 구입했다. 답이 없는 암담한 노조회의 때 책을 들어 보이며 호언장담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 곧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심에 합격하고 드디어 녹화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뉴스 속보. 32세 백수 아빠, 퀴즈 영웅으로 거듭나다. 오늘 제 인생의 반전 드라마, 제가 직접 취재합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생계형 출연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반전 드라마’라고 말한 것은 퀴즈 영웅이 되어 소감을 얘기할 때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서 알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쉬운 문제도 있었지만 어려운 문제, 특히 헷갈리는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용케 오답을 피해 1단계→2단계→3단계(파이널 라운드)를 마치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우승자에게는 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금 퀴즈를 풀 자격이 주어진다. 다행히 1000만 원짜리 문제를 두 개 맞혀 퀴즈 영웅이 되고 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파업 기간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 녹화장에는 가족들도 와 있었지만 파업 기간 함께 고생했던 선배 기자들도 와 있었다. 그들을 보자 파업 기간에 힘들었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퀴즈 영웅 소감을 말하는 순서에서는 준비했던 대로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알리는 말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편집되었다. 그래도 퀴즈 영웅이 된 것은 화제가 되었다.
필요한 금액 6000만 원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지만, 다행히 민생고는 해결되었다. 집주인이 조건 없이 1년 동안 계약을 연장해주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상금을 받으면 절반은 아내에게 생활비로 주고 절반은 노조에 파업기금으로 내겠다고 했는데, 세금을 내고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돈을 노조에 파업기금으로 냈다. 나중에 이 돈은 〈시사IN〉 창간기금으로 쓰였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퀴즈 영웅’이라는 것은 인생을 반전시킬 계기가 된다. 그해 겨울 ‘퀴즈 영웅 왕중왕전’에서 만난 다른 퀴즈 영웅들의 삶도 그렇게 방송 전후로 달라져 있었다. 2000만 원 혹은 3000만 원의 상금이 그들의 삶을 크게 윤택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퀴즈 영웅을 계기로 인생이 새로워졌다.
그해 겨울 ‘왕중왕전’이 열렸는데 거기 참가한 퀴즈영웅들의 사연들도 남달랐다. 이발사 장래형 씨(46)는 퀴즈 영웅이 된 것에 대해 “무기력해져 가는 40대 후반 나이에 자신감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두 번의 항암 치료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박밀향씨(46)에게는 퀴즈 영웅이 된 것이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계기로 다가왔다고 했다. 박밀향 씨는 왕중왕전에서 우승을 했다.
이발사 퀴즈 영웅 장래형 씨의 사연은 흥미로웠다. 그가 퀴즈 공부를 시작한 것은 손님이 없을 때 이발소에서 졸지 않기 위해서였다. 공부한 것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렇게 정리한 상식 노트가 수십 권이나 되었다. 노트 덕분에 그는 퀴즈 영웅이 될 수 있었고 천안시장의 초청을 받고 시장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평소 말을 잘 안 듣던 아들이 이제는 ‘공부하는 아빠’를 본받아 시키지 않아도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고 했다.
퀴즈영웅이 되었을 때 나는 파업 중이라 주변에 베풀 겨를이 없었는데 다들 퀴즈 영웅이 되고 난 뒤 한 번씩 ‘영웅의 호기’를 부려보았다. 고형주 씨는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3000만 원을 기증해 시계탑을 세웠고 국제 구호활동에 관심이 많은 김시은 씨(53)는 스와질란드에 재봉틀 5대를 보냈다. 김철호 씨(36)는 여동생 결혼자금으로 상금을 쾌척했고, 공인중개사로 동네에 지인이 많은 권오식 씨는 주변 사람에게 서른 번 정도 식사 대접을 하며 인심을 썼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는 말처럼 주변에서 대신 기분을 내는 경우도 많았다. “상금으로 부대원들에게 컴퓨터를 사주고 싶다”라고 말한 홍성진 경위(26)의 충정은 경찰청장에게 알려져 경찰청에서 컴퓨터 6대를 해당 부대에 기증했다. 대전 만년중학교 교장선생님은 김시은 씨를 위해 ‘경축! 만년중학교 김시은 교사 퀴즈영웅 등극!’이라고 쓴 펼침막을 만들어 걸어주었다. 장래형 씨의 이발소가 있는 찜질방 사장님은 장 씨 대신 주변 상인들에게 저녁을 사주었다.
그때 내가 부린 호기는 여행이었다. 여행상품권 100만 원짜리 두 장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상품권으로 최고급 휴양지를 찾았다(조금 더 보탰던 것 같다). 브루나이의 엠파이어리조트라는 곳이 7성급 리조트라고 광고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정했다. 파업이라는 지옥 속에서 일주일간의 천국을 맛보았다. 가장 짜릿한 여행 중 하나였다.
인생의 저점을 적극적으로 통과한 것은 나중에 큰 힘이 된다. 물론 최고의 라떼 안주도 되고. 가끔 암울할 때면 그때 생각을 한다. '그래 그런 시절도 있었는데 이 정도 쯤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군이 되어준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비겁하지 않게 행동했던 것이 나중에 큰 힘이 된다. 내 소신대로 하더라도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니까.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