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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열 여행감독 Sep 25. 2021

'문어체' 김훈이 아니라 '구어체' 김훈을 만나다

토크콘서트 <김훈, 겨우 쓴다>를 준비하며...


땅을 파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관이 구덩이 속으로 내려갈 때, 내 어린 여동생들은 따라 들어갈 것처럼 땅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불에 타는 듯한, 다급하고도 악착스러운 울음이었다. 나는 내 여동생들을 꾸짖어 단속했다. “요사스럽다. 곡을 금한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에서 ‘광야를 달리는 말’의 일부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훈을 ‘문어체’로 접했다. 시사저널 편집국장과 평기자의 관계로 내가 만났던 김훈은 늘 ‘구어체’였다. 다른 작가들도 그렇겠지만 구어체 김훈은 문어체 김훈과 달랐다. 저세상 텐션으로 사는 듯한 문어체 김훈과 다른 인간의 온도를 가진 김훈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토크콘서트 <김훈, 겨우 쓴다>(경기아트센터, 9/25)는 그런 의도로 기획한 행사다.   


특히 여행자로서의 김훈에 주목했다. 그의 문학적 성취는 남다른 여행 능력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사연의 전후좌우를 다 서술하지 않고 간략히 개요만 던지지만 탁월한 르포르타주 문학이다. 그리고 그의 여행기에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이나 <흑산>이 이미 잉태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01 김훈은 장난꾸러기

이번 토크콘서트와 관련해서 김훈 작가가 내건 유일한 옵션은 ‘재밌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루하지 않게 질문을 짧게 끊어서 신변잡기를 다뤄보자고 했다. 문학평론가도 아니고 그의 전작을 읽지도 못한 상황이라 반가운 제안이었다. 실제로 구어체 김훈은 술자리의 장난꾸러기다. 낄낄거리며 실없는 농담을 자주 던진다. 민족의 재간둥이 황구라(황석영) 못지않은 구라꾼이다. 자전거(풍륜)를 타고 자유로를 지나는데 과속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서 벌금 날아올까 걱정이라고 뻥을 친다.  


#02 우리가 몰랐던 김훈

김훈은 요즘 말로 '겉바속촉'이다. 주례 선생님이었던 김훈 작가를 나는 ‘사회적 아버지’라 생각한다. 그런데 어려운 아버지다. 그래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예열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몰입적인 사람이 곁을 내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술이 몇 순배 돈 뒤에 바삭한 껍데기 안쪽의 촉촉한 속이 드러난다. 김훈의 촉촉한 속은 재미있다.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  



#03 그는 이율배반적이다

김훈은 마초 가운데 가장 섬세하고 섬세한 사람 중에는 가장 마초적이다. 이 이율배반이 그 안에 공존한다. 버려진 철가방을 들고 와 잘 닦아서 원고지 서랍장으로 쓰고,  스탠드에 시쓰루 스카프를 매달아 빛을 다스리고, 가을볕에 잘 말라비틀어진 꽈리를 꺾어와 책장 장식을 하는 김훈의 모습은 지극히 섬세하다. 그 섬세함 위에서 권위적인 문어체 문장이 나온다는 사실이 이율배반이다.   


#04 훌륭한 독거노인

김훈은 그 나이의 다른 원로 작가와 비교하면 손이 별로 안 가는 작가다. 집필실에 손님이 오면 본인이 물을 따르고 커피를 내리고 자리가 파하면 바로바로 설거지를 한다. 자립성도 강해서 문학관에 장숙할 때 누룽지를 쌓아놓고 스스로 끓여먹으며 허기를 면한다. 물론 분명 누룽지를 쌓아놓고 끓여먹었는데 <라면을 끓이며>라는 책이 나와서 의아하긴 했다. 2탄 <누륭지를 끓이며>를 기다려본다.   


#05 조용필과 닮았다 

조용필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김훈이라는 ‘언어의 파인다이닝’과 조용필이라는 ‘음악의 파인다이닝’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닮은 점은 이렇다. 고독하게 지낸다(그래도 지인이 오면 반긴다). 대화할 때 예열 시간이 필요하다(가볍게 즉답하지 않는다). 삶의 루틴이 단조롭다(집과 연습실/ 집과 집필실). 남의 노래 안 듣고 남의 소설 안 읽는다. 기본에 충실하다(조용필은 세계의 민요를 듣는다/ 김훈은 국어대사전을 펴놓고 읽는다). 생활에서 사치를 부리지 않는다(겉절이를 먹으러 울진에 간다며 나름 플렉스도 부린다). 


#06 그의 책장에는 문학이 없다

김훈의 책장에 시나 소설은 없다. 문학의 재로만 있다. 그는 “필요한 것만 꽂아 놓는다”라고 말한다. 집필실에는 침구 한 벌과 운동기구 한 벌이 있다. 먹고 자고 운동하며 그의 표현대로 꾸역꾸역 쓰는 셈이다. 그의 책장은 요리사로 치면 양념통이고 기술자로 치면 공구통이다. 그의 삶에는 문학 외에는 먹고 자고 운동하고만 있는 것이다. 조용필이 “음악 하지 않는 순간에는 그냥 숨만 쉬고 싶다”라고 말했는데 김훈 역시 문학하지 않는 순간에는 숨만 쉬고 있었다.  



#07 묻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얼핏 김훈의 여행기를 읽으면 상념으로 가득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함부로 지레짐작하지 않는다. 조사해서 파악한 것으로, 물어서 안 것으로부터 상념을 시작한다. 검색도 안 하시는데 자료 조사는 어떻게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모르면 물어본다. 전문가에게 연락해서 설명을 듣는다”라고 심플하게 답했다.  


#08 그의 방랑에는 소실점이 있다

지역 답사를 갈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참고한다. 사람들은 김훈을 문장가라고 칭송하는데 그렇게만 보는 것은 그들의 안목이 짧은 탓이다. 그는 부지런한 준비가다. 승부는 준비에서 판가름이 나있다. 그는 공간에 시간의 돋보기를 들이댄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리서치한 자료로 덤비는데 누가 당하겠는가. 취재에서 격차가 더 벌어진다. 그는 아무튼 붙들고 묻는다. 그렇게 거리에서 건진 사금이 책에서 꽃을 피운다. 마지막으로 문장은 조금 거들뿐이다.  


#09 자의식이 강하다(자존감이 높다)

자신이 오감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는 자의식이 있어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김훈이 그렇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원효와 의상과 최치원을 끌어들여서 그들의 권위에 기댄다. 김훈은 모든 상념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순신의 탈을 쓴 김훈을 보았다.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인조의 탈을 쓴 김훈을 보았다. 자의식이 강한지라 타 장르로 변주될 때도 관대하다. 당신의 무대에서는 당신이 알아서 하라며 자율성을 보장한다. 다만 적을 비루하게 그리지 마라,라고 유일한 옵션을 제기한다.  


#10 세상에 절망하고 인간에 희망한다

김훈은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절망한다. 고칠 수 없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독재정권 하에서 권력이 시킨 기사를 자신이 죄다 썼노라고 실토한다. 구조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비록 회의론자이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말년에 시민운동에 나선 것도 최소한의 안전 조건을 갖춘 일터를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그의 소박한 진심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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