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여가의 미래’라고 쓰고 스스로 ‘허비의 미래’라고 읽는다. 허비의 관점에서 여행과 여가의 미래를 보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면서,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로 개인에 천착하면서 소비가 아니라 허비의 관점으로 들여다봐야 할 현상이 두루 관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소비는 합리적이지 않다.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면 허비하게 된다. 이런 소비와 허비의 변증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비는 허비를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허비하지 않으면 절약(합리적 소비)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합리적 소비에 대한 이해는 있지만 맥락적인 허비에 대해서는 감이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좋은 사회는 좋은 허비를 하고 나쁜 사회는 나쁜 허비를 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허비를 하고 있고 어떤 허비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좋은 허비다. MZ세대는 스스로 허비의 맥락을 깨우쳤다.
문제는 기성세대다. 소비에는 소비의 논리가 있고 허비에는 허비의 맥락이 있다. 허비란 여백이 있는 소비다. 소비가 모던하다면 허비는 포스트 모던하다. 논리가 아니라 맥락의 영역이다. 한류의 원천은 소비일까 허비일까. 우리는 할리우드와 팝문화를 게걸스럽게 허비했기에 오늘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지금의 풍요 전에 허비의 맥락이 있었다.
취향의 영역에서는 J커브가 자주 나타난다. 품질에 비례해서 가격이 증가하다가 어느 대목에서 급증하는 양상이다. 와인이 그렇고 차가 그렇다.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가격이 된다. 이 구간의 소비를 합리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허비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한 지금은 허비의 맥락을 살펴야 할 때다.
뉴스레터 <월간 과소비>를 발행할 예정이다
합리적 소비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이유는 합리적 소비가 장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행과 여가의 영역은 꼭 합리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허비 프레임은 나름의 묘수였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여행도 그렇다.
여행의 영역에서 합리적 소비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형이 바로 수학여행과 워크숍이다. 지금 기성세대가 다녔던 수학여행은 학습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바뀌었고 워크숍도 직원들의 팀워크나 업무 능력 향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바뀌고 있다. 여행을 기획해 보라면 전교 1등 반장이 수학여행 짜듯이 답사 여행 코스를 짜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수학여행과 워크숍에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확행의 저편에 허비의 블랙홀이 있기도 하다. 40대 후반 50대 초반에 큰 허비를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큰 만족을 얻으려다 큰 골칫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다. ‘갱년기’에 즈음해 지금 자신에게 보상해주지 않으면 늦는다는 자의식(혹은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좋은 사회는 좋은 허비를 유도하고 나쁜 사회는 나쁜 허비를 유도한다고 했다. 허비의 가능성을 보고 허비의 블랙홀을 만들어 비즈니스 모델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충분히 허비하지 않고 남의 허비를 일삼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허비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취향의 과식을 유도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왜 ‘나쁜 허비’가 나타날까? 우리의 취향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소믈리에 되려는 사람처럼 와인을 공부하고, 바리스타 되려는 사람처럼 커피를 공부한다. 왜? 피아니스트 될 것처럼 바이엘과 체르니로 피아노를 공부하고 자랐으니까. 소비에 있어서도 1970~1980년대 산업사회 프레임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허비해야 할 일을 소비한다.
허비란 온전히 나와의 대화여야 한다. 나의 내밀한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허비하지 못하는 것은 자존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내밀한 목소리에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좋은 ‘허비자’가 되기 위해서는 허비해도 된다는 강한 자의식이 필요하다. 남이 뭐라던 나한테 의미가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된다는.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은 허비하게 된다. 다들 나만의 '허비스토리'가 있다. 이걸 당당히 얘기하고 '허밍아웃'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소비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허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일이다. 허비에는 진솔한 자기 고백이 있다.
허비와 관련해서 주목할 세대가 있다.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X세대/신세대/신인류라는 얘기를 들었던 포스트 386세대다. 1970년대 초중반생, 199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니고 이제 50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그들이 주인공이다. 그 시절 X세대/신세대/신인류가 어떻게 50대를 살아가는지를 들여다보면 ‘허비의 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허비의 사회학'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세대도 아이러니는 있다. 한국이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을 때 그 샴페인 맛을 보았지만 샴페인에 옷이 젖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사회생활 초기에 IMF를 겪으면서 소비성향이 급격히 위축되었던 세대다. 여행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마음은 나도 한비야인데, 몸은 하나투어인 사람’. 바쁜 일상에 치여 노을을 살지만 늘 탈출을 꿈꾸는 세대다.
X세대와 그 윗세대(386세대와 산업화세대)는 여행지에 가보면 차이가 난다. 이를테면 크루즈여행을 하면 기항지에서 윗세대 사람들은 다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안내를 기다리지만 X세대는 닭장 속의 닭을 풀어놓은 것처럼 자신이 검색한 기항지 여행 아이템을 찾아 훨훨 날아간다.
이들에게는 ‘허비력’이 잠재되어 있다. 이들이 50대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허비의 시대’에 돌입할 것이라고 본다. 몇몇 징후를 바라본다. 쫄깃쎈타와 같은 게스트하우스 문화와 홍대 앞에서나 볼만한 카페 문화를 제주에 이식한 주역이 이들이다. 이전 세대가 50대에 들어서서 전원주택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려고 했을 때 이들은 도시를 통째로 옮겼다.
분명 이 세대의 일원이지만 시골 출신이라 스스로 삶이 그리 허비적이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에 의도적으로 허비를 도모하고 있다. 중학교 때 서울에 전학 와서 느낀 것은 ‘내가 살고 있던 곳이 형용사와 부사의 세계라면 도시는 명사와 대명사의 세계구나’. 명사와 대명사가 형용사와 부사의 역할을 했다. 그 명사와 대명사의 세계를 만끽해 보려고 한다. 허비의 시대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