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전에 썼던 글이다, 기록을 위해 남긴다
2008년의 일이다. ‘2008 대학 총학생회선거’에 관한 특집 기사를 취재했다. 기존의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 대한 두 가지 프레임, ‘운동권 총학생회에 대한 반감’ ‘학우들의 무관심’이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에 함께 하지 않은 비운동권 총학생회에 대한 심판 선거가 치러지면서 이전과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를 기획 기사로 꾸렸다.
취재를 하면서 의아한 것이 있었다. 각 학교 총학생회에 대한 문제제기나 총학 선거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주로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학보사 등 학내 언론 게시판이 논쟁 무대가 아니었다. 학보사 등 학내 언론은 양비론적인 기계적 비판기사만 내고 있을 뿐 총학생회 선거와 관련한 ‘공론의 장’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대학 총학생회 선거판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지만 그 변화가 학교 담장 너머로 전달되지 못했고 학우들의 관심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대학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블로그(고재열의 독설닷컴)를 통해 대학언론의 문제를 짚어보기 시작했다. 심각했다. 심지어 ‘학교 비판 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학보사 기자로 임명되는 대학도 있었다.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실렸다고 학보를 통째로 훔쳐가는 총학생회도 있었다. 어쩌다 대학언론이 요지경에 이르렀는지, 참담한 심정이었다.
학교 당국과 총학생회는 ‘회유와 협박’을 통해 대학언론을 길들이고 있었다. 장학금 취재비 회식비 등으로 학보사 기자들을 길들이는 학교가 많았다. 그런 당근을 주면서 주간교수는 기획에 관여하는 채찍을 휘둘렀다. 재정을 학생회비에 의존하는 대학언론은 총학생회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재정을 무기로 총학생회가 대학언론을 기관지처럼 활용하려는 사례가 왕왕 눈에 띄었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대학언론에서 언론자유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까지 후퇴해 있었다. ‘그래 봤자 기사로 쓸 수도 없는 걸’, 미리 체념하고 학교 비판기사는 아예 기획도 하지 않는 ‘자기 검열’ 단계까지 이른 것 같았다. 대학언론 기자들의 어깨는 처져 있었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외부의 압력에 대응하는 자세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웠다.
대학언론 기자들에게, 분연히 떨쳐 일어나라고 쉽게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는 것은 기사 취재와 기사 작성과 같은 기자의 중요한 업무의 하나다. 직업으로서 언론인을 생각하는 대학언론 기자라면 대학언론 활동을 토해 기자의 기술뿐만 아니라 기자의 자세도 익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론자유에 대한 맞섬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학교 당국이 서라는 데로, 총학생회가 서라는 데로 앞줄을 맞춰서는 안 된다. 언론은 비판기능을 토해 집단에 기여하는 곳이다. 줄서기 강요에 따라서는 안 된다. 앞으로 나란히가 아니라 옆으로 나란히, 줄을 맞춰야 한다. 동료들과 옆줄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옆줄을 맞추고 언론의 원칙을 사수해야 한다. 내가 뒷걸음질 치면 그만큼 언론자유가 후퇴한다는 각오로 옆줄을 맞춰줘야 한다.
기자는 판단을 하는 직업이다. 어떤 것을 기사화할지, 어떤 부분을 취재할지, 어떻게 기사화할지,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 기자 개인의 판단뿐만 아니라 게이트 키핑 과정을 겪으면서 남의 판단까지 곁들여진다. 뉴스는 결국 복합적인 판단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좋은 기사란 옳은 판단의 결과물이다. 옳은 판단을 하기 위해서 기자는 때로 불편을 감내해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불편한 판단을 감당하는 기자는 좋은 기자고 편한 판단에 안주하는 기자는 나쁜 기자다. 기자가 편해지려고 할수록 독자가 불편해지고 기자가 불편을 감수할수록 독자가 편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그러나 불편한- 판단과 나쁜 -그러나 편한- 판단은 어떻게 나뉠까? 그것은 누구를 염두하고 한 판단인지에 따라 구별할 수 있다. 독자를 염두하고 한 판단인지, 취재원을 염두하고 한 판단인지, 경영진과 데스크를 염두하고 한 판단인지에 따라 질이 갈린다. 전자일수록 좋은 판단이고 후자일수록 나쁜 판단이다.
나쁜 판단보다 더 나쁜 것은 판단을 회피하는 것이다. 판단을 피하는 것은 갈등을 피하는 것이고, 갈등을 피하는 것은 논쟁을 피하는 것이다. 논쟁을 피하는 것은 언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것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으로 언론의 역할을 방기 하는 것이다.
기자는 판단할 때 판단해야 하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 끝없이 되물어야 한다. 기자가 올바른 판단을 했는지 판단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상식의 나침반이다. 상식은 과거의 경험이 빚어낸 총체적 결과물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약속이며 미래의 전제조건이다. 기자는 상식의 나침반에 합당한 판단을 해야 한다. 언론은 상식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판단의 관점에서 ‘대학 언론의 위기’를 짚어보자면, 대학 언론인들이 불편한 판단을 회피하면서 이 위기가 심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교 당국의 간섭과 총학생회의 압력 등에 대해 그때그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면서 문제를 키웠고 간섭과 압력이 점점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대학언론인들에게도 핑계는 있다. 대학 당국은 교묘한 방식으로 간섭을 정당화하고 있고 누대에 걸쳐 선배들이 방치한 문제라 이제 관행화되어서 고치기 힘들다. 학내 언론독립 문제를 학우들이 외면하기 때문에 동력도 없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문제를 풀어야 할 주체는 ‘지금, 우리’라는 것이다.
학내 언론독립 문제를 들여다보라는 것이 결단을 내리라는 얘기는 아니다. 판단을 유보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문제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문제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대학 사회의 상식’을 지키기 위해서 불편한 판단을 감내해야 한다.
대학 언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언론인의 기본자세를 물어야 한다. 기자는 판단을 하는 직업이다. 독자인 학우들을 위한 불편한 판단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불편한 판단이 모여 대학언론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대학 사회의 상식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