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무용가 마리솔은 트래블러스랩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여행지에서 여행자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으로는 플라멩코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장소에서 결정적인 시간을, 마리솔은 구현해 주었다. 지난 2년 동안 문경 단산 활공장에서 함평만의 석양 데크에서 제주올레의 길 위에서 ‘길 위의 살롱’을 구현하며 여행자들에게 선물 같은 순간을 선사했다.
마리솔은 솔리스트 무용수로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고 자신의 예술세계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자존감 높은 무용수지만 품이 넓다. 플라멩코 보컬이나 기타 혹은 퍼커션과 함께 할 때 그들을 돋보이게 해 준다. 가야금이나 비보잉 등 다른 장르와 콜라보할 때도 마찬가지다. 솔(태양)처럼 혼자서도 빛나지만 마르(바다)처럼 모두를 품어준다.
마리솔은 늘 무대에서 몸짓으로 말한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자연인 최원경으로 돌아온다. 처음으로 자연인 최원경에게 무용가 마리솔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녀는 덤덤하게 자신의 춤과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앞은 그녀의 독백이고 뒤는 인터뷰다.
# 마리솔의 독백
“나는 하얀색이다. 일상의 나는 조금 무미한 사람이다. 내 색깔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왜 색깔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색깔이 없는 것도 하나의 색깔이라고, 나를 받아들인다. 나는 나의 무미를 예찬한다. 하얀색은 다른 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최고의 준비색이니까.
플라멩코를 추면 나는 하얀색에 오렌지색을 색칠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세비야는 밝은 오렌지색이고(Naranja de Sevilla), 세비야는 플라멩코의 도시다. 플라멩코의 도시 세비야는 밝은 얼굴을 하고 이방인인 나를 맞아 주었다. 이글거리지만 따사로웠던 세비야의 햇살을 맞고 자란 오렌지는 언제든 싱그러운 에너지를 나에게 주었다. ‘환희’의 뜻을 가진 작품 <알레그리아스>(Alegrías)를 통해 내가 기억하는 세비야의 오렌지나무를 표현한다. 열매가 열리기 전 오렌지꽃의 향기 그리고 아름답게 시내를 물들인 오렌지 나무.
세비야는 또한 집시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울분을 담아 힘차게 땅을 짓밟는 플라멩코 무용수의 발구르기에는 이런 집시의 애환이 담겨있다. 나의 작품 <띠엔또스>(Tientos)는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숲, 나무의 초록색이 느껴지는데 나는 안달루시아의 집시들이 가진 대지에 대한 깊은 한, 그들의 외침을 생각한다.
플라멩코를 추면서 나는 점점 빨간색이 된다. 내 안의 정열을 계속 끌어올려 짙은 빨간색이 된다. 춤을 추면서 내 안의 정열이 차오르는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나의 열정을 보여주는, ‘마리솔 레드’를 보여주는 작품은 <카르멘>(Carmen)이다. 플라멩코를 추면서 내 안의 카르멘을 찾아 무미한 최원경이 아닌, 정열적인 마리솔로 변신한다.
나는 검은색을 즐긴다. 화려한 프릴치마 대신 검은색 바지를 입고 춤을 출 때 편안함을 느낀다. ‘케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어로 귀소본능·피난처·안식처·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원래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와의 싸움 중에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영역을 뜻하는 말이다. 투우소들은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싸움을 준비한다. <파루카>(Farruca)는 내가 숨을 고르고 힘을 얻어 다음을 준비하면서 추는 춤이다.
절정의 순간, 나는 화려한 금색이 된다. 플라멩코를 출 때 나는 고귀해진다. 나에게 플라멩코는 자유를 향한 날갯짓이다. 금빛 망토를 휘날리며 춤을 출 때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것처럼 자유로워진다. <판당고>(Fandango)를 출 때 특히 그렇다. 일상의 무미한 나를 벗어나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또 다른 나를 만난다.”
# 마리솔 인터뷰
플라멩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고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어느 날이었다. 신문에서 우연히 플라멩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한 장에 온 마음을 빼앗겼다. 스페인 플라멩코의 거장 카르멘 모타가 이끄는 무용단의 ‘푸에고’ 공연 사진이었다. 처음 가 본 예술의전당에서 이 작품을 관람했다. 푸에고(Fuego)의 말 뜻처럼 내 마음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수소문해서 플라멩코를 배우기 시작했다.
플라멩코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다면?
플라멩코 특유의 발동작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떠돌던 집시들이 땅을 향한 우수 어린 한의 정서를 담아서 표현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플라멩코 발전에 집시들이 많은 역할을 하긴 했지만 집시들만의 문화는 아니다. 이민자 문화와 스페인 남부 지역의 전통, 안달루시아 사람들의 열정과 애환이 녹아들어서 현대 플라멩코가 만들어졌다.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우고 온 것으로 알고 있다.
2017년부터 2년간 플라멩코의 본고장인 스페인 세비야에서 연수를 받았다. 세비야는 2011년 3개월간 연수를 받았던 곳이다. 스페인 현지의 플라멩코가 정말 궁금했고, 이 춤을 취미로 할 것인지 앞으로 깊이 있게 계속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낯설고 힘들었지만 3개월 동안 세비야에서 플라멩코를 추면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살아 숨 쉬고 있음에 희열을 느꼈고, 플라멩코 말고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3개월의 스페인 연수가 마리솔을 어떻게 바꿔 놓았나?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올 때는 기본적인 스페인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언어를 익히고, 테크닉을 배울 때 문제가 없도록 보디 컨트롤을 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플라멩코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발레, 재즈댄스, 현대무용 등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스페인 장기 연수는 어떻게 준비했나?
준비하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시 떠나기 전 3년 동안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 거의 하루도 쉰 적 없이 일했다. 유아 댄스&발레를 가르치는 곳에 소속되어 월-토요일까지 문화센터 유치원 공공기관에 출강했고, 일요일에는 플라멩코 초급반 레슨을 했다. 어쩌다 쉬는 날엔 다른 강사들의 대강(대타로 강의 감)을 지역 상관없이 다니며 비용을 모았다.
플라멩코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플라멩코는 한국에서 제대로 접하기 어려운 장르다. 라이브로 하면서 노래(Cante), 기타(Toque), 춤(Baile)을 함께 맞추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플라멩코 무용이 함께하는 경우에는 보통 무용이 음악적 구성을 리드해 가는데, 플라멩코의 다양한 장르와 파생된 음악들의 구조를 이해하고 다른 멤버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려웠다.
플라멩코를 위해 포기하거나 절제하는 것이 있는가?
내 몸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를테면 음주같은 것. 아무리 재밌어도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지 않는 것. (스페인에서 보통 공연이나 피에스타가 밤 10시부터 시작이라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았다.) 또래 다른 여성들 보다 트레이닝복을 자주 입는다. 내 몸을 움직이기 편한 상태로 놓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경을 여러군데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플라멩코가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적을까 봐 불안하지는 않은가.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아니 표현한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무대에서 몸짓으로 표현한다. 그것으로 충분히 표현된 것 같다. 모두가 불안을 붙들고 산다. 불안은 열정의 이면이 아닐까, 불안하니까 더욱 열정적일 수 있는 것 같다.
마리솔의 플라멩코는 대체로 어떤 스타일인가?
플라멩코는 손동작과 발동작이 화려하다. 나는 그중 발 구르기에 특히 흥미를 느꼈다. 몸이 악기처럼 소리를 내고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 그 자체로 흥분되었다. 밑창에 여러 개의 못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 플라멩코 구두를 신고 춤을 추면 크고 리듬감 있는 소리를 낸다. 대부분의 춤이 에너지를 위로 발산한다면 플라멩코는 마치 바닥을 찍어누르듯 땅으로 에너지를 압축한다. 묵직한 에너지를 빵 터뜨리는 그 느낌이 좋다. 나에게 에너지가 급속히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플라멩코 안에서도 장르가 다양한 것 같다. 마리솔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가?
내가 추는 춤을 간단히 나누자면 플라멩코와 단사 에스빠뇰라(Danza española)로 나눌 수 있다. 플라멩코 안에 여러 장르(Palo)들이 있고, 단사 에스빠뇰라에 속하는 여러 스페인 춤이 있다. 플라멩코와 단사 에스빠뇰라, 그 모든 춤이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전통적인 스타일과 현대적인 스타일 모두 좋아한다. 그때그때 상황과 감정에 맞는 춤을 춘다. 물론 나의 기반은 플라멩코이다. 어떤 장르의 춤을 추어도 플라멩코의 느낌과 감성이 들어있다. 장르와 음악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의 위로를 건네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마리솔플라멩코’를 추고 싶다.
플라멩코가 화려하고 여성적인 경향이 있는데 마리솔의 레퍼토리 중에는 중성적인 안무도 있다.
파루카(Farruca)라는 장르인데 스페인 북쪽 갈리시아지방에서 유래한 장르다. 보통 여성 무용수도 바지를 입고 추는데 투우사의 이미지가 연상이 된다. 초창기엔 여성적인 것보다 남성적인 스타일을 좋아해서 남자 무용선생님 수업을 즐겨 듣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느 한 스타일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려고 한다.
국내에 와서는 주로 어떤 무대에 올랐나? 귀국 다음 해에 코로나19가 발발해 활동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스페인 문화 관련 기획공연 등 여러 공연에 참여했다. 한 달 예정이었던 인천공항 문화공연을 하다 코로나로 중단되기도 했다. 활동이 어려웠지만 그 와중에도 다행히 오페라 <카르멘> 공연, 제주 올레축제 공연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무대가 마리솔을 어떻게 성장시켰나?
지속적으로 무대에 서면서 무용수로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영감을 주었던 공연은 트래블러스랩과 함께했던 ‘길 위의 살롱’이었다. 해발 800m인 문경 단산 활공장에서의 무대, 함평만 노을빛 아래에서의 무대 등 여행지에서 경험한 무대는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본인이 리더가 되어 프로젝트팀을 꾸린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음악적 시도를 하고 있는가?
한국적 감수성을 살려서 플라멩코를 국악과 접목해 새로운 차원의 실험을 해보았다. ‘길 위의 살롱’에서 가야금 연주자 하소라와 콜라보 무대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함께 퓨전 그룹을 꾸려 보었다. 비보잉, 가야금, 기타, 퍼커션 멤버를 영입해 ‘비플소리’라는 이름의 팀을 꾸려서 9월부터 12월까지 매달 공연을 가졌다.
이렇게 콜라보를 하면 레퍼토리는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가?
이 부분은 기록을 위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 인트로 곡으로 힙합과 플라멩코의 컬래버레이션을 했고, 두 번째 곡은 심청전을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여기에 어울리는 플라멩코의 각 장르를 연결시켜 보았다. 이런 구성이었다.
1. 심청 x Siguiriyas (시기리야스)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플라멩코 무용 중 어둡고 고독한 느낌의 이색적인 리듬의 시기리야스로 연결시켰다.
2. 뺑덕어멈 x Bulerías (불레리아스)
뺑덕어멈이 나오는 장면은 진도아리랑과 플라멩코 불레리아스 리듬을 연결시켜 보았다.
3. 심봉사 x Tientos (띠엔또스)
안대를 한 심봉사 역할을 비보이가 하고, 나중에 맹인잔치에서 심청이를 만나 눈을 뜨고 모두 함께 즐겁게 파티를 하는 것을 표현해 흥겹게 마무리했다.
마리솔에게 플라멩코란?
인생을 살아가며 느끼는 깊은 슬픔, 고독, 두려움, 상처, 불안 등을 이겨내고 에너지를 얻게 해 준다. 또한 플라멩코를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원래 나는 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이다. 플라멩코를 통해 내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붙잡아 이를 밖으로 발산하는 것 같다. 춤출 때는 사람이 다르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도 내가 궁금하다. 무대 위에서 내가 얼마큼 달라질 수 있을지, 나를 어디까지 발산할 수 있는지, 한 번 끝까지 가보고 싶다.
앞으로 어떤 활동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가야금 연주자 하소라와 함께 <사의 찬미> 곡으로 콜라보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사가 나의 심정과 각오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 옮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