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출신이지만, 나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7년 뒤인 1987년 여름에서야 알았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진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집에 전남대학교 농활대 형들이 묵었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전두환의 중저음 목소리를 좋아하는 모범생이었다.
처음에 대학생들이 내 방을 일주일 넘게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사실 싫었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방을 갖게 되었는데 그걸 내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우리집에 처음 왔을 때 나는 건성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농민가 등을 가르쳐 주었을 때도 나는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그 영상물을 보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중에 그 영상물을 제작한 사람이 ‘푸른 눈의 목격 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독일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Juergen Hinzpeter)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세계관이 바뀌었다. 전두환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주류 세계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아마 그때 이후로 '주류'에 대한 지향성이 사라진 것 같다.
'서울의 봄'과 6월 항쟁을 지나 민주화의 열기로 뜨거웠던 여름이었지만, 전라도 시골까지 그 열기가 미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동네에서 대학생들의 농활 자체를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 마을에서는 우리집과 마을에서 대학 나온 동네 형님네 집만 대학생들을 받아주었다. 동네에서 가장 잘 사는 그 향님 집이 농활대의 본부 격으로 이용되었고 우리집엔 주로 1~2학년 남학생들이 묵었다. (그때 내 방에 묵었던 대학생들은 전남대 86학번 87학번 화학공학과 형들이었다).
농활대가 떠나고 나서 농활대를 우리집에 받아준 것이 결단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면사무소와 농협과 지서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압력이 왔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는 "우리 마을에 일 도와주러 온 학생들을 한 데서 재우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집에 들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험악한 시절, 아들에게 소중한 추억이 될 멋진 판단을 해주신 그 시절의 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그 이듬해 암으로 돌아가셨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도망 나온 시위대에게 음식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었다.
대학생들을 집에 들인 것은 두 가지를 포기한 결단이었다. 하나는 이장이든 뭐든 관과 관련된 자리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농협 대출 등 관의 도움을 받을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평범한 시골 농부에게 쉽지 않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찍히는 일이었을 테니...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많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빚을 지고 살지는 않았다. '자립'이 아버지가 보여준 용기의 비결이었다. 그때 내가 배운 것은, 욕심을 버리고 부지런히 살아야 나중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시사저널 파업 때 이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나중에 정치할 욕심이 있던 선배, 삼성과 내통하고 있었던 선배, 신용불량자 상태였던 선배, 이들 셋만 동료들을 배신하고 사주에 들러붙었다.
억압과 탄압만이 진실의 목소리를 막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YTN MBC KBS 파업 때도 똑같이 확인했던 진리다. 자기 일로 인정받았던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앞에 나섰다가 화를 입었다. 그들만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으니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이 '정의의 자격'을 얻는다.